臣
語源
臣의 최초의 본래 뜻은 남성 노예 혹은 포로를 뜻했다. 상여에서 말하길, 본래 노예는 “남자는 臣, 여자는 妾”이다. 일반적으로 신분이 비천한 하인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그 뜻이 파생되었다. 갑골문과 금문의 臣자는 수직으로 서 있는 눈을 나타낸다. 노예는 주인의 앞에서 눈을 세우고 평소처럼 볼 수 없었고, 오직 고개를 숙이고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기에, 눈이 수직의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세로로 세워져 있는 눈은 노예를 의미하였고, 즉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굴복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臣’은 또한 신하의 ‘예의로 받들다. 굴복하다’의 뜻을 가진다. 노예가 존재하고, 봉건군주가 통제하던 시절에는 각급 관리에서 평민까지 모두가 일반적으로 모두 제왕군주의 부하였고, 군주 앞에서는 모두 자신을 ‘臣’이라 칭했다.
文化
노예 감시자의 튀어나온 눈을 그린 것이다. 신하(臣)란 처음 눈을 부릅뜨고 노예를 감시하는 사람이었다. 노예를 감독하는 臣이란 직책은 나라가 커지면서 역할이 커지고, 공경대신이란 직책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변하지 않은 건 주인에 대한 충성이었다.[1]
중국사를 통틀어 농업은 줄곧 국가와 백성들의 수입을 보장하는 주요산업이었다. 최초 몇몇 왕조시대에 제왕들은 관리를 파견해 농사의 과정을 감독하게 함으로써 생간을 직접 통제했다. ‘신하, 장관’이라는 뜻의 ‘臣’자는 감시하는 사람의 커다란 눈을 형상화한 것이다. 마치 “여보시게, 내가 당신네들을 지켜보고 있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도 제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하인이나 다름없었다. 칼그렌은 ‘臣’자가 “절하고 있는 눈”을 그린 것이며, “눈은 고개를 숙인 채 명령을 듣는 사람의 형상”이라고 했다.[2]
‘臣’은 대부분 전쟁에서 잡은 포로.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새끼로 꽁꽁 묶어 놓은 형상이 마치 희생을 묶어 끌어당긴 것과 비슷하여 「설문」에서는 「牽也」라 하고, 포로들은 몸이 묶여서 자유로이 펼 수가 없으므로 굴복한 형상을 본뜬 자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臣’은 원래 희생 취급을 받은 전쟁포로의 뜻이었는데, 점차 군주시대의 관리를 칭하는 말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갑골문자형은 노예가 주인 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므로 자연히 눈알이 불쑥 튀어나온 형상을 상형한 자로 보인다. 그래서 ‘臣’은 ‘民’자와 더불어 노예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3]
臣은 끌고 간다는 뜻이다. 군주를 섬기는 사람이다. 臣부에 속하는 한자는 모두 臣의 의미를 가진다.[4]
「설문﹒3편하」에서는 臣의 형상을 「像屈服之形」이라 하였다. 臣, 즉 전쟁 포로들이 묶여있는 형상을 설명한 것이다. 사람이 묶여 있으면 몸을 펼 수가 없으므로 몸이 굽어져 있는 상태가 된다. 그 자형을 「像屈服之形」와 같이 설명한 것이다.[5]
시라카와 시즈카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을 臣이라 하였다. 臣은 커다란 눈의 형상인데, 그 한 눈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고대의 현자(賢者)는 노예 출신의 사람들이 많았다.[6]
- ↑ 김성재,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 동녘, 2000, pp.556
- ↑ 세실리아 링크비스트, 『한자왕국-한자로 떠나는 중국 연사 문화 기행-』, 김하림·하영삼 역, 청년사, 2002, pp.181
- ↑ 이돈주, 『한자·한어의 창으로 보는 중국 고대문화』, 태학사, 2006, pp.57
- ↑ 염정삼, 『설문해자주-부수자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pp.121
- ↑ 왕닝﹒시에똥위엔﹒리우팡 저, 김은희 역, 『「설문해자」와 중국고대문화』, 학고방, 2010, p.85
- ↑ 시라카와 시즈카, 『漢子 백가지 이야기』, 심경호 역, 황소자리, 2005, pp.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