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왕망의 등장과 신의 설립
왕씨 외척 가운데 왕봉(王鳳), 왕음(王音), 왕상(王祥), 왕근(王根)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잡았다. 원제 말년에 대사마 왕근이 사직하고 대신 원후의 조카인 왕망이 그 요직에 이르게되었다. 왕망은 검소하면서도 유학을 좋아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겸손하였기 때문에 존경과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는 애제가 즉위하면서 부태후와 의견이 맞지 않아 신도로 돌아갔다. 애제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부·정씨 두 태후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태황태후 왕씨가 다시 궁정의 주인이 되어 평제가 즉위하였다. 이 때 왕망은 태부가 되어 안한공(安漢公)이라 불리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왕제는 평제 재위 때에 유가를 중심으로 적지 않은 선정을 베풀어 신임을 받았지만, 그는 야심을 키워 평제를 독살하고 어린 아들 영(嬰)을 즉위시킨 다음, 스스로 정사를 대행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가황제라 칭하고 관료와 백성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서기 8년에 왕망은 가황제에서 천명을 받아 진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다. 이로써 전한은 214년 만에 멸망하였다.
신의 개혁과 실패
왕망은 즉위하면서 여러 방면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유가의 경전을 근거로 관명을 고치고 서주 시대의 제도를 부활시켰다. 따라서 왕망의 개혁을 총칭하여 탁고개제(托古改制)한 복고 정치라 부른다. 정치적으로는 봉건 제도를 회복하고 왕전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구가에 귀속시켰다. 경제적으로는 육완(六莞=管)제도를 실시하여 소금과 철, 술의 전매는 물론 산이나 연못에서 얻어지는 이익도 모두 국가가 경영하였다. 또 사회적으로는 노비제를 폐지하고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왕망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왕망의 개혁 정책은 실제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고, 전반적인 계획과 준비도 없이 즉흥적이었다. 또한 화폐 제도가 번잡하여 경제적 혼란을 가져왔으며, 대외 정책에서도 실패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가증시켰다.
반란과 신의 멸망
신(新) 말기에 왕망에 대한 불만이 터지면서 왕망에 반대하는 봉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먼저 낭야의 번승과 동해의 조자도가 군사를 일으켰다. 번승의 군사는 왕망의 군사와 구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물들여서, 스스로 적미라고 불렀다. 이것이 이른바 적미(赤眉)의 난이다. 호북의 녹림산에서도 여러 지방의 유민들이 모여 왕광과 왕봉을 지도자로 ‘녹림당’을 만들었다. 한나라 황실의 후예인 유연(劉縯)과 그의 아우 유수(劉秀)도 용릉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앞서 봉기한 반란군이 모두 유연 등의 군사에 합류해서 따랐다. 유연은 녹림병과 함께 유현을 한 황제로 추대하여 연호를 경시(更始)라 하고, 완(宛)에 도읍을 정하였다. 유수의 군대는 23년에 곤양(昆陽)에서 1만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백만 대군의 왕망의 군대와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중국 전쟁 사상 최소의 병력으로 엄청난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해진 ‘곤양의 싸움’이다. 이후 유수의 군대가 왕망을 죽임으로써 신은 16년만에 멸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