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역사
후한의 건국
유현은 유수 형제의 공을 질시하여 유연을 죽이고 도읍을 낙양으로, 다시 장안으로 옮기고 유수를 하북으로 보냈다. 결국 유수가 그 곳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 서기 25년에 호(鄗)에서 제위에 올랐다. 이 때 적미병이 장안으로 들어가 유현을 죽이자 유수는 적미병을 토벌하고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다. 이 나라를 후한이라 부르며, 왕망의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한나라 황실의 후예인 유수가 바로 후한의 광무제이다.
통치체제
국가유교
군현제
사회제도
외교
후한의 대외관계
후한의 성립 이후 무제는 왕망시대에 실추된 주변 민족에 대한 권위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한이 다시 서역을 장악하기 되는 것은 73년 북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장군 두고가 서역 제국의 설득을 위해 부하인 반초를 파견한 데서 비롯되었다. 반초는 왕망정권 이후 60년 만에 부활된 서역도호로서 30년간 서역 땅에서 지내며 동서 교통로의 재확보에 주력했다. 그 사이 대월지의 침입을 저지했고, 파미르고원 동서의 50여 개국을 한에 조공국으로 복속시켰다. 더 나아가 서방의 대진국과의 통교를 위해 부하인 감영을 파견했다. 감영이 대진국에 이르지 못해 반초의 꿈을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활약으로 인해 실크로드는 동서를 잇는 교역로로 발전했다. 그러나 반초 이후 강족의 침임과 반란에 시달리면서 서역에 대한 영향력은 계속 후퇴했다.
실크로드
광무제는 월지국이 흉노에게 패했다는 정보를 얻게 되자, 그들과 연합하여 흉노를 칠 계획으로 낭관인 장건을 사자로 월지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월지에 파견된 장건과 그의 일행은 즉각 흉노에게 잡혀 10여 년간 억류되었다. 이 동안에 그는 흉노 여성을 아내로 맞아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탈출하여 수십 일만에 대월지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하를 속국으로 삼아 번영한 이 나라는 흉노와 싸울 의지가 없었으므로 장건은 1년 남짓한 체류 후에 타림 분지의 남쪽을 거쳐 귀로에 올랐다. 거기서 그는 다시 한번 흉노에게 붙잡혀 1년간 억류되었지만 내분을 이용하여 126년에야 가까스로 창안에 돌아왔다. 장건의 목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로 인해 서역의 사정이 중국에 알려졌다. 서역에는 36국이 있었는데 이들 국가들이 연결되는 길을 통하여 중국과 서역의 문물이 교류되었다. 중국의 비단이 서쪽으로 운반되었고, 서역의 특산인 포도와 석류 등은 물론 인도의 불교도 이 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전해 왔다. 바로 이 길은 비단길, 또는 실크로드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