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서태후(西太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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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5.11.29 |
사망 |
1908.11.15 |
생존시기 | 청(淸) |
별칭 |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 서태후황태후(慈禧皇太后) |
가족 | 남편 함풍제, 아들 동치제, 조카 광서제 |
칭호
서태후(西太后)라는 호칭은 사실 공식적인 칭호가 아니다.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황후 뉴구뤼씨(鈕鈷祿氏)에게는 아들이 없어 서태후의 아들이 동치제에 즉위하였다. 이에 그녀와 함품황제의 황후 뉴구뤼씨(鈕鈷祿氏)는 황태후로 추대되어, 서태후(慈禧)와 자안(慈安)이라는 휘호를 받았고, 세상 사람들은 서태후태후를 자금성 서쪽에 산다고 하여 서태후(西太后), 자안태후를 자금성 동쪽에 산다고 하여 동태후(東太后)라 불렀다. 이 문서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서태후’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생애
유년 시절[1]
1835년 10월 10일, 베이징의 한 후퉁(胡同)에서 미래의 서태후가 태어났다. 이름 높은 만주족 가문인 엽혁나랍씨(葉赫那拉氏) 출신이지만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는 ‘목련’ 혹은 ‘난초’를 의미하는 ‘란(蘭)’이라는 설과, 단어는 ‘좋은 운수를 의미하는 ‘행(幸)’과 같은 발음인 ‘행(杏)’ 설만 있을 뿐 명확하지 않다. 서태후의 집안은 유복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정부 관리로 종사했다. 만주족이었던 그녀는 전족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남녀유별 사상 때문에 서태후는 만주어를 배우지 못했고, 대신 학식 있는 집안의 딸로서 약간의 한문(漢文)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회화(繪畵), 자수(刺繡) 등 여성에게 필요한 기술을 익혔다. 1849년, 서태후의 아버지 혜징이 몽골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임명됨에 따라 그녀의 가족은 몽골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녀는 평생 동안 시원한 공기와 탁 트인 땅을 열정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궁 시절
1852년 봄, 청 황실의 정기적인 전국 규모 궁녀 간택에서 당시 16세였던 서태후는 황제의 눈에 들어 궁녀로 뽑혔다. 하지만 그녀는 후궁이었고, 아주 낮은 등급에 머물렀다. 황실의 비빈에게는 8단계의 계급 체제가 있었는데, 서태후는 하위 그룹(6~8)인 6급에 속했다. 새 황후는 정(貞)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는데, 그녀는 5급에서 출발하여 넉 달도 안 되어 1급, 즉 황후로 올라섰다. 이 황후가 바로 동태후이다. 사실 후궁 시절 서태후는 함풍제의 그렇다 할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서태후가 함풍제의 근심거리에 동참하고 조언을 행했기 때문이다. 청 황실은 오래된 정통에 따라 궁중의 비빈들이 국사에 참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해왔다. 함풍제는 서태후의 조언이 ‘건방지고 교활하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1856년 4월 27일, 서태후는 아들을 낳았고 이후 그녀는 1급으로 승급되어 하급의 후궁 생활을 정리했다.
권력의 시절
1861년 함풍제가 죽고 아들 동치제가 황위에 올랐지만 서태후는 정치적 실권이 없었다. 그녀는 먼저 귀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태후라는 칭호를 얻었고,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함풍제의 유언에 따라 8명의 고명대신들로 구성된 섭정단(攝政團)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실질적인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다.
1873년 동치제가 공식적으로 황위에 오름으로써 서태후는 물러나는 듯 보였으나, 2년만에 동치제가 사망함[1]으로써 다시 권력을 잡는다. 특히 그녀는 후사가 없는 동치제의 후계자를 정할 때 자신이 할머니로 승격되어 제국을 통치할 구실이 없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세 살 난 조카를 입양한 뒤 황제로 삼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그렇다 할 애정을 주지 않았고, 그가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권력을 더 유지하기 위해 그의 결혼을 미루는 등 광서제와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18세가 된 광서제는 친정을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서태후에게 있는 것과 다름없었고, 둘의 관계는 계속해서 나빠졌다. 1898년, 광서제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시행했지만 서태후의 반대로 실패하게 되었고, 서태후는 이 일을 계기로 광서제를 궁중에 유폐한 뒤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말년
광서제 유폐 이후 그녀는 삶을 마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권력은 쓰러져 가는 청 왕조에서의 권력이었을 뿐, 청은 이미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여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서안으로 몽진을 갔다가 1902년 초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일련의 개혁을 진행한다. 그녀의 개혁에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통혼 금지 철폐, 전족의 철폐, 과거제 폐지, 신식 군대 확충 등 당시에서는 파격적인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크게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혁명운동 및 입헌운동 고조의 분위기 속에서 청은 결국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다. 1908년, 광서제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서태후는 두 살 난 부의(溥儀)를 황제로 지명하고 생을 마감한다.
기타
외모
서태후는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기품 있는 자태를 갖고 있었다. 키는 150센티미터를 조금 넘었지만 항상 꼿꼿하게 앉아서 우아한 몸동작을 했고, 특히 피부가 아주 좋았으며, 부드러운 두 손은 노년에 이를 때까지 윤택함을 유지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다가도 느닷없이 위엄을 내뿜는 눈빛을 번쩍거렸는데, 그 유명한 원세개(袁世凱)마저도 그녀의 눈빛을 보면 진땀이 나고 불안했다고 한다.
일상
서태후는 미신을 믿고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만주족의 샤머니즘을 맹신했다.‘천우신조’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고 마음이 복잡할 때면 손에 상주문을 들고 반나절을 정좌했다.
아름다움을 매우 중시해 손수 고안해서 화장품을 만들기도 하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일정 시간대에 화장대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지저분한 모습을 싫어하여 머리를 빗어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고, 항상 뜨거운 물로 손 관리를 하여 매끄러움을 유지했다.
한편 서태후의 식사 때는 매번 120가지 넘는 요리가 올라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같은 음식을 세 숟가락 이상 뜨지 않았고, 다음 날에도 절대 먹지 않아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사실 이런 습관은 서태후의 개인적인 식습관이라기 보다는 음독의 해를 입지 않도록 선대부터 내려온 일종의 궁중 규범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담배 피우는 것을 즐겼고 특히 물 담배를 좋아했다.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는 우유였고 차에도 섞어 마셨다.
참고자료
1) <서태후,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1,2> 장융 저
2) <서태후와 궁녀들> 룽얼 구술, 진이•선이링 저
3) <眞實的慈禧> 류치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