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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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海禁)
명(明)나라와 청(淸)나라가 실시한 해상 교통‧무역 등에 대한 제한정책이다. 1371년 명나라 홍무제(洪武帝)는 왜구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사적으로 외국과 교역을 금지했고, 이후 청나라에서는 반청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해금을 실시했다. 해금정책은 연해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민간무역이 정지된 이후 조공무역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해상무역을 통제하여 연해의 경제발전과 국내경제에 타격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명‧청 이전 중국의 해양정책
중국의 역사에서 국가차원에서 바다를 통한 대외무역을 담당한 것은 당(唐)나라 때부터이다. 당대에는 시박사(市舶司)라는 관직을 두었다. 시박사를 통해 민간무역 화물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고 탈세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송(宋)대에는 광주(廣州), 항주(杭州), 천주(泉州) 등에 시박사를 확대 설치하여 해외교통과 무역을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성립하였고, 원대에도 이를 유지하여 해외교통과 무역을 보호‧장려했다. 송대에 이르기까지 외국과의 교류는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원(元)대에는 국제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13~14세기에는 남중국해부터 인도양‧아라비아해에 걸친 해역은 동서의 무역상인이 왕래하는 배경이 된다. 송대와 원대에는 적극적인 해외무역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대시켰다.
명대 초기에도 명주, 천주, 광주 등에 시박사가 설치되어 해외무역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명대 홍무제 초기(1371년) 내려진 해금령에 의해 민간의 경제적 교역은 통제된다. 해금 초기에는 일정 조건을 갖추면 민간무역이 허용되기도 하였으나 홍무 7년(1374년) 일반 민중과 상인의 해외왕래는 금지되었고, 외국상인에게도 제한이 가해진다.
해금 출현 배경
주원장(朱元璋)은 원(元)을 내쫓고 1368년 명을 건국한다. 이후 북벌을 시작하는데, 화북지역을 평정하고 북경을 점령하는 성과를 이룬다. 하지만 원의 세력들이 명의 국경을 노리고 잔존해있었기 때문에 이를 몰아낼 필요가 있었다. 홍무 5년 대규모 병력을 조직하여 이를 몰아내려 했지만 원과의 전투에서 계속하여 패배한다. 명은 원에 연달에 패배하며 북원을 토벌하는데 신중을 가하게 되고, 원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기보다는 영토를 더욱 강력히 통제하고 병력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연해지역에서는 왜구와 해적의 침입도 계속된다. 이들은 복건지역이나 명주 일대 등을 공격하는 등 연해지역에서의 피해는 끊이지 않았다. 또한 원말 조선사업과 소금매매로 성장한 장사성‧방국진 등이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북벌이 소강상태에 놓이면서 홍무제는 국내를 안정시키는데 주력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혼란스러운 연해와 해안을 안정시켜야 했다. 이렇게 연해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야만 하는 배경에서 해금정책은 나타나게 된다.
명대 해금정책
홍무제, 영락제 시기 해금정책
해금은 홍무 4년(1371년) 왜구의 침입 방지나 해적 방지, 밀무역 단속을 목적으로 한 정책이지만 홍무제가 해금정책을 시행한 직접적인 이유는 왜구 침입 방지에 있었다. 이 당시 사적인 무역의 통제는 시박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명나라 초기에는 광주, 천주 등에 시박사를 설치하여 무역을 장려하고 관세를 징수했다. 해금령이 내려진 상황에서도 일정한 조건을 가지면 민간무역이 가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국내경제 방어, 주변국가와의 조공무역 확대 등을 이유로 홍무 7년(1374년) 시박사를 폐지하고 민간무역을 전면적으로 금지한다. 이렇게 명나라 시기 해금은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무역통제 기능과 함께 밀무역 단속으로 조공무역을 보완하며 이를 더욱 곤고하게 하는 정책으로 자리매김한다. 홍무제 이후 영락제(永樂帝)는 해금을 바탕으로 한 조공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1403년에는 시박사를 부활시켜 조공국의 방문을 대비하고, 1405년부터 정화를 파견하는 등 외국에 사절을 활발히 파견하여 조공관계를 확대하였고, 동남아시아의 해적을 토벌하기도 했다.
홍무제, 영락제 이후 해금정책
홍무‧영락 시기를 거치며 해금과 조공은 상호보완 되어 해금-조공체계로 발전한다. 해금은 치안과 해양방어를 위한 정치적 목적. 해상통제의 일환이었고, 조공무역은 후왕박래(厚往薄來)를 원칙으로 하여 단순한 이익 추구가 목적이 아닌 외교적 관계를 쌓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주변국가와 조공이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제한적인 교역과 교류를 하면서 연해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외교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또한 주변의 나라들을 조공체계에 끌어들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영락제 이후 명조는 긴축 재정을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소극적이 되었고, 이에 따라 해금정책도 완화된다. 1449년 토목보의 난으로 북방 방어가 주요 관심사가 되자 후왕박래의 원칙에 따라 시행되었던 조공무역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밀무역도 점차 번창하게 된다.
청대 해금정책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조는 북경에 입성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여러 세력에 부딪혔다. 특히 연해에서는 대만의 정성공 정권의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정성공 정권은 명나라 시기 일본과의 밀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청조는 입관 초기에는 민간무역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정성공 정권을 억압하기 위해 1655년 해금령을 시행한다. 허가증을 소지하지 않으면 해외무역을 제한하고 대형선박의 제조를 저지했다. 1661년에는 해외무역뿐만 아니라 연안의 무역이나 어업까지 금지하는 해금을 시행한다. 또한 연해민을 내지로 이주시켜 정성공 세력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밀무역을 금지하는 등 강력한 해금을 실시한다. 하지만 연해의 밀무역은 단절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1684년 대만의 정성공 세력이 망한 후 하문, 광주 등에 해외교통과 무역을 관리하며 관세를 징수하는 기관을 설치하여 비교적 완화된 해금정책을 실시한다. 1684년 완화된 해금정책은 주변국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것에 그쳤고, 민간 어선의 연해에서의 조업활동 등은 허용되었다. 또한 해외무역은 일정한 수속을 거치고 조건을 만족시키면 허용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민간무역을 허용하면서 선박 크기에 따른 탑승인원과 탑재 가능한 식량의 양에 대해 규정하며 미곡 유출을 막고, 자국민들을 통제하여 해외로의 이주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