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여성
목차
중국의 신여성
정의
중국 신여성담론은 중국에서 청말부터 시작된 여성 평등 사상을 지칭한다. 신여성 담론의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아편 전쟁 후 서양의 문물 수용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시기를 시발점으로 생각하고 5.4 운동을 절정으로 생각한다.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주목받기 시작하고 중국 지식인 내부에서 신여성이라는 담론이 등장한 것은 신청년이라는 잡지가 창간된 후이다. 하지만 신여성의 맹아는 신문화운동 이전부터 자라났으며 5.4운동에 이르러 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신여성 담론의 발현을 5.4 시기로 정의하고 무술유신 이전부터 5.4 운동까지의 기간을 신여성 사상의 맹아기로 정의하겠다.
신여성사상의 맹아
무술유신
무술년 이전 시기부터 무술유신까지 신여성의 맹아가 등장한 이유는 이 시기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 낙후의 문제를 전통에서 찾은 까닭에 있다. 즉 전통적인 여성상은 낙후된 중국 문화이며, 중국이 발전하기 위해선 발전된 서양의 여성 문화를 받아드려야 한다는 이 시기 지식인들의 생각이 신여성 맹아의 등장 배경이다. 이 시기 진행된 신여성 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전족 반대운동과 여성 교육 운동이다. 강유위의 주도로 시작된 전족 반대 운동은 양계초에 의해 구체화 되었고 <전족반대동맹조례>로 구체화된다. 이 시기 전까지 진행되던 중국에서의 여성교육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1884년에 미국 감리교가 진강 보개산에 설립한 여숙을 들 수 있는데, 이 여숙의 규정을 살펴보면, 여숙에서 진행되던 교육이 근대적인 평등 교육이었다기 보다는 중국의 봉건적 여성교육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여숙에서 전족을 한 여성을 그대로 교육을 했으며, 서양인이 세운 학교에서 전족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인에 의해 전족을 금지하자는 주장이 나온 후였다. 따라서 이 시기 이전까지의 중국 여성교육을 완전한 여성 평등을 위한 교육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청일 전쟁이 지나고 1903년이 지나서야, 양계초를 필두로 중국 지식인들에게 중국 여성 교육의 필요성 재기된다. 양계초는 중국이 여성을 교육시켜야 하는 이유를 '소득을 나누어쓰는 폐단을 극복해야함', '여성의 재주없음을 극복해야 함', '교육을 통해 좋은 어머니가 되야 함',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태교를 해야 함'으로 정의한다. 종합해 볼 때 이 시기에 등장한 여성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의 이유는 부국에 있다. 즉 중국이 잘 살기 위해선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여성들이 현모양처가 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술유신 이후
무술유신이 서태후에 의해 허무하게 실패로 끝나고, 연합군이 북경을 점거해 서태후가 도망가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만주족 정부인 청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고, 중국 전역에서는 청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혁명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 시기 급진적인 지식인 김일에 의해 여계종이라는 책 한 권이 발간된다. 이 책에서 김일은 중국 여성의 대표적인 문제는 전족, 몸치장, 미신에 빠지는 것, 구속되어 사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여성의 능력이 저하되고 구속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 중 흥미로운 것은 네번 째 구속되어 사는 것인데 그에게 있어 여성 구속의 근본전인 원인은 결혼이었다. 그에게 전통적인 결혼이란 남성에 의한 여성의 구속이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남녀간의 교제를 공개적으로 하고 혼인을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강유위는 주장한다. 이는 당시로써는 매우 진보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무술유신 이후 시기의 지배적인 담론이 아니였다. 무술 유신 이후 부국을 위해 여성에 대한 교육을 확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완전한 교육의 평등이라고 보긴 힘들다. 왜나하면 무술유신 이후 세워진 여학당들의 입학총의에는 여성 교육의 목표를 교사를 양성하고 유아 보육 방법을 익힘으로써 가계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으로 정의를 했기 때문이다. 즉 이런 교육은 평등을 위한 교육이라기 보단 무술년의 교육처럼 부국을 위한 여성 교육이라 고 할 수 있다. 즉 이 시기 국가나 민간에 의해 실시된 여성교육은 신여성을 위한 교육이라기 보단 현모양처를 만들기 위한 전통적인 여성상에 연장선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성의 교육이 사회 전역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실제로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여성들이 교육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이 두 시기는 신여성 담론의 맹아기로 볼 수 있다.
신해혁명
청조가 몰락하고 신사상이 대두되긴 했지만, 신해혁명 이후에도 신여성이라는 담론은 체계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신여성의 맹아는 신해혁명에서도 자라나고 있었다, 혁명군이 무한에서 세 곳의 진영을 점령하고 병력이 부족해 징집 광고를 내자 오숙경이라는 여성은 무한 혁명 정부의 대도독이었던 여원홍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도 군대에 들어와 힘을 보태고 싶다고 주장했다. 여원홍은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오숙경은 혁명에서 남녀간의 차별이 있어선 안된다고 여원홍을 설득해 여원홍은 대대적으로 여군을 모집하게 된다. 이런 여군에 대해 대중들은 뜨겁게 반응했으나, 신해혁명 간부들은 여성의 참전을 조롱거리로 생각했다. 신해혁명의 간부들이 여성의 참전을 동의하자 않자 오숙경의 여군은 곧 해산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여성들은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제한적인 지위밖에 갖지 못하는 현실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남경 임시정부에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한다. 실제로 이 시기에 신주여계참정동맹회, 여자동맹회 같은 단체가 생겨 여성의 평등을 조직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다. 당군영 등 20인을 대표로 이 단체들은 임시정부 약법에 남녀 평등 조문을 넣어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임시 약법에 이런 내용은 들어가지 않게 되고 여권 운동가들은 분노하여 여자참정동맹회의 당군영을 대표로 손문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한다. 이들의 항의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참의원의 유리창을 깨고 경비를 걷어차는 등의 난폭한 행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즉 이 시기 여성들은 자신들이 불평등 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이는 신여성 사상의 맹아가 발현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신여성사상의 등장
신문화운동(잡지 신청년)
진독수에 의해 발간된 신청년이 등장하게 된 시기는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고 했던 시기와 비슷하다. 신해혁명을 통해 봉건에서 벗어난 지 몇 해 되지 않아 위안스카이에 의해 다시 봉건제도로 돌아가게 될 위기를 느낀 진독수는 계몽을 통해 이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진독수는 봉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몽시켜야 할 대상이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진독수는 청년 지식인들을 독자로 하는 신청년을 발간하게 된다. 즉 진독수는 1916년 원세계가 황제로 집권하려고 하는 시기에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신청년을 통해 청년들에게 피정복자의 지위에 자신을 놓아뒤 말 것과 타인의 부속품이 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신여성 사상은 이 잡지로 인해 본격적으로 발현되며, 결혼제도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주체로써의 신여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원세계의 황제의 열망이 무산되자 이번엔 공자가 신중국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시기 중국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위정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수용해 다시 강한 중국을 만들자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진독수에게 공자는 봉건의 상징이었고 그는 공자를 따르자는 위정자들을 비판하며 <헌법과 공자의 가르침>이라는 글을 신청년에 쓰게 된다. 이 글에서 진독수는 공자의 사상과 반대되는 여성의 참정권, 재가의 자유, 공개적인 사교활동, 경제적 독립, 핵가족 제도 등을 부국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정의하며 공자 사상을 비판하고 이를 따르자는 위정자들을 비판한다. 잡지 신청년에서 신여성 사상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건 신청년에 주작인이 소개한 여사야정자의 정조론이 실리면서 부터이다. 이 글은 전통적으로 여성에 도덕적 의무로 강요되어 왔던 정조는 사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취향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중국 여성을 억압하던 전통들 역시도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당시 청년들과 지식인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정조문제, 나의 정절관과 같은 글로 이어지며 신여성 사상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적과 같은 지식인들은 신여성의 모습을 다룬 서양의 문학작품을 앞다투어 소개했으며 이를 통해 중국 신여성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을 구체화 시켜갔다.
5.4 운동
5.4운동의 목표는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맹아로부터 서서히 성장해 신문화운동을 통해 발현된 신여성 사상과 맞물려 폭발적인 신여성 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조에서 지식인이면서 젊은 여성들은 전통적인 교육, 직업, 결혼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 먼저 교육부분을 살펴보면, 이들은 이전까지 나뉘던 남과 여의 교육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광범위하게 받아드려졌다. 먼저 소학교에서 남녀공학이 보편화 되었고, 대학에서도 여성의 입학을 허락한다. 실제로 1922년에는 대학에서 이전까지 전무하던 여성 신입생이 665명이 입학한다. 이는 무술유신 이전부터 성장하던 교육의 평등이라는 맹아가 발현되었음을 시사한다. 신여성 운동은 직업 분야에서도 발현되었다. 5.4운동 이전에도 여성은 일을 할 순 있어도 일정 부분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5.4 이후 신여성운동은 이런 제한을 서서히 제거한다. 실제로 5.4 이후 남자 학교에서도 여교사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북경, 천진, 상해 등의 대도시에서는 여주가 운영하는 상점도 생겨났다. 신여성운동을 통해 지식인 계층에서는 여성들도 능력만 갖추면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관념이 생겼다. 신여성 운동은 결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 지식인들에게 전통적인 결혼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자유 연애들 추구했으며 결혼의 조건이 애정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하게 되었다. 신여성운동은 신해혁명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여성의 참정권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여성운동을 통해 여성의 고등교육이 가능케 되자, 여성 지식인의 수는 날로 늘어갔으며, 신여성운동을 통해 직업에서의 평등사상이 자리잡히자 신해혁명에서 여성의 참정을 조롱하던 위정자들도 더 이상 여성의 능력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은 점차 정계로 나아갔고 여성의 참정권이 일정부분 생기기 시작한다. 실제로 광동의 임시성의회는 여성에게 한정적인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여성의원 10명이 선출되었다. 또한 호남성에서는 비슷한 시기 남녀평등 조항을 법률에 추가하고 여성 의원 왕창국을 선출했다. 이런 직업, 결혼, 교육, 정치에서의 남성과 평등한 신여성의 등장은 생활로도 이어졌다. 실제로 과거에 여성의 상징이었던 전족은 이제 부정적인 것이라는 의식이 지식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자리잡았고, 또한 전통적인 머리카락과 의복 역시도 여성의 억압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 여성 지식인들은 머리를 자르고 개량된 의복을 입었으며 전족에서 벗어나 과거보다 자유로운 주체로 설 수있게 되었다.
중국 신여성의 한계
5.4운동과 신문화운동을 기반으로 진행된 신여성 운동이 중국 여성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이 운동을 통해 여성들은 고등교육이 가능해졌고, 정치에 일정부분 참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통 혼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여성에 대한 한계가 중국 지식인 내부에서 지적되기 시작했다. 이런 한계를 지적한 사람 중 대표적인 지식인은 루쉰이다. 루쉰이 1917년 신청년에 기고한 <나의절열관>을 보면 그는 여성을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므로 남편이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면 않되고, 그가(남편이) 살아있으면 물론 빼앗길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한다. 즉 루쉰에게 전통적인 여성은 남성의 물건으로 인식되었다. 더불어 “정복당한 국민이 되어보호할 힘도, 저항할 용기도 없어지면 하는 수 없이 이상한 묘안을 짜내어 여자들의 자살을 고취시킨다.”라고 말하며 전통적인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과 사회에 대해 비판하며 신문화와 5.4 운동에 등장한 자유연애로 대표되는 신여성 담론을 찬성한다. 하지만 루쉰은 5.4 운동때 등장한 신여성 담론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신여성 담론이 뜨거워 지고, 어느정도 실현이 되었을 1925년에 [[<애도(傷逝)>]]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에서 자유연애로 대표되는 신여성 사상을 갖는 쯔쥔은 애인 쥐엔셩과 함께 동거를 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경제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불행하게 되고 결국 쯔쥔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죽게된다. 이 쯔쥔에 죽음에 대해 쥐엔성이 반성을 하는 것으로 소설을 끝난다. 이 소설의 결론에서 유추해 볼 때 노쉰이 생각하는 신여성 담론의 한계는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쯔쥔은 동거를 시작한 후 집안일 때문에 지적활동을 할 수 없게된다. 반대로 쥐엔셩은 동거 후 가사 활동을 하지 않고 지적 활동에만 열중하게 된다. 이에 따라 쯔쥔은 쥐엔성이 사랑했던 신여성적인 모습을 잃고, 이 둘은 헤어지고, 쯔쥔은 죽게 되는 것이다. 즉 신여성 사상으로 집을 뛰쳐나온 쯔쥔은 빈곤과, 집안일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다시 전통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노쉰은 뒤에 발표하는 산문 <로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통해 신여성의 한계를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이 산문에서 로쉰은 로라가 집을 나가 할 수 있는 선택이 '타락'아니면 '회귀'이라고 정의하며 이것을 5.4 운동 당시의 신여성 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즉 여성들이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하더라도, 남성이나 사회가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여성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존재하며, 사회적 차원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런 신여성들이 신여성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온다고 하더라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부정한 여자이기 때문에 전통적 사회에서 조차 온전한 지위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5.4운동 당시의 신여성 담론은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켰다기 보다는 다른 방식으로의 폭력으로 작동하며,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쉰이 주장한 해결 방법은 경제이다. 즉 여성이 돈을 갖고 있을 때, 신여성 사상은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경제권을 갖기 위해 끈기가 필요하며, 채찍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5.4 운동 당시 일어났던 신여성사상은 일정부분 여성의 인권을 향상시킨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문화운동이나 5.4 운동에서 대중의 참여가 미비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당시 등장한 담론들은 사회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지식인들에 국한된 것이 었다. 따라서 신여성 사상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개인적 차원에선 계몽된 여성일 순 있었겠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부정한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더불어 신여성 사상으로 머리를 자르고, 자유연애를 했던 여성들을 받아줄 수 있는 사회는 미완성적인 상태였고, 이에 따라 신여성들은 전통과 신사상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들로 전락해 버렸다.
참고문헌
- 가족제도와 국가권력의 벽을 넘어서, 조세현
- 루쉰 소설의 페미니즘적 해석에 대한 재검토, 전형준
- 루쉰의 여성 해방 운동, 유세종
-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 진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