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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이름은 지(贄), 호는 탁오이다. 별호로는 굉보, 탁오자, 이화상, 독옹, 백천거사 등이 있다. 1572년 복건성의 천주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엔 임재지라는 이름이었지만 수재 시험에 합격하고 천주부학에 들어간 뒤에 종가의 성을 따르면서 성을 이(李)로 개명하였다. 천주의 거상이었던 그의 7대조 이노(李駑)가 무역 때 만난 색목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친족들에게 멸시를 당했고, 이 때 성을 이에서 임으로 바꾸게 되었다.



인물소개

사상가나 문학가로 알려진 이지의 파격적인 면모와는 반대로 그는 꽤 오랜 세월동안 주자학의 세계에 머물렀다. 유년 시절부터 관례대로 유학을 공부했으며, 26세 때 거인에 합격해 54세가 되는 해까지 관료 생활을 했다. 40세가 되던 해에 이봉양과 서용검의 권유로 왕양명의 학문(양명학)을 접했고 이때부터 이지의 독특한 세계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왕양명의 뜻을 계승한 태주학파 중에서도 이지는 극좌적인 성향을 가졌으며, 동심설을 주장하며 기존의 유학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관직을 그만둔 후에는 강학을 하며 다녔는데 제자가 수 천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는 부녀자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분서』가 있다.

사상

왕양명의 사상

이지를 비롯해 태주학파의 기틀이 된 왕양명의 사상은 '지행합일'(知行合一)로 정리된다. 지행합일은 주자가 지(知)에 중점을 두어 얘기한 '선지후행'(先知後行)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지’와 ‘행’ 모두가 중요하며, 이(理)를 밝히는 것은 ‘치량지(致良知)’라는 실천적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양지(良知)’란 모든 사람에게 품부되어 있는 역량으로 양심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하지만 양지는 지각작용을 갖추지 못하여 사물의 형태나 용도를 알아내는 것은 의념의 역할이라고 말하였다. 선천적이고 지각적인 그의 실천적 도덕설은 주자학과는 다른 측면으로 봉건 사회 속 지배적인 도덕의 잣대가 되었다.

태주학파

왕양명의 지행합일설은 그 취지가 성인의 도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었지만 이는 일반 백성들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추상적이며 모호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나선 이가 바로 태주학파의 창시자 중 한명인 왕간(王艮)이다. 그는 일반 백성들이 따르기 쉽도록 위가 아닌 아래로 향하는 철학을 추구했다. 그의 철학은 왕간의 아들인 왕벽(王壁)의 제자였던 이지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지는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인륜이며 사물의 이치”라고 말했다. 이는 왕간의 ‘百姓日用卽道(백성들의 일생상활이 곧 도)’와 같은 맥락의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공리와 물질을 중시한 그였지만 이지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도 멈추지 않았는데, 그런 그의 생각이 발현된 것이 바로 동심설이다. 이지는 또 다른 태주학파의 창시자인 왕기의 양지설도 받아들였다. 왕기는 왕양명이 설명한 양지와 의념의 모호한 해석에 대하여 진정한 양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과감히 의념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물질생활을 최소화하고 환경의 간섭을 피하여 무선무악의 경계에 도달한다면 일체의 진실성을 얻게 된다고 보았으며, 이는 오로지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경계에 이르게 되면 굳이 남에게 드러낼 필요가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왕기의 현성양지(現成良知)라는 실천론은 이지 본인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자신과 관련한 일련의 추문이나 인신공격 등에 대해서 대응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무시해버릴 수 있었으며, 무선무악의 경계에 진입한 것에 대해 굉장한 자유와 우월감을 느꼈다.

인간평등의 철학

이지는 봉건 사회 속에서 불평등했던 남녀의 관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앞장섰던 학자 중 하나이다. 그는 송대의 유학자들과는 다른 시점으로 남녀의 관계를 바라봤다. 이지는 남녀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이 부당한 대우임을 주장하며 여성을 옹호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식견에 있어 남녀가 차이난다는 말에 강하게 반박했으며, 몇 명의 여성을 제자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미학적 관점

진(眞)이란 정성의 지극함이다. 정성스럽지 않으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진정한 슬픔은 울음이 없어도 슬프고, 깊은 노여움은 굳이 화를 내지 않아도 위엄이 서며, 진정한 친함은 웃지 않아도 화합이 된다. 진정이 안에 있으면 밖으로 정신이 드러나니, 이것이 진정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예란 세속인이 행하는 바이고 진정이란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것이므로 자연 바꿀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늘을 본받고 진정을 귀하게 여기며 세속에 구애되지 않는다.(장자 제 31편 중) 일단 그럴싸한 풍경을 보면 감정이 솟구치고 눈길 닿는 사물마다에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술잔을 빼앗아 자신의 쌓인 우수에 들이붓게 되고, 마음속의 울분을 하소연하거나 천고의 기박한 운명에 대해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하늘이 내시고 땅이 키워서 온갖 꽃들이 자라나니,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사랑하게 되지만 그 안에 내재된 조화의 기교만큼은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찌 인간의 지혜로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이지 분서 중)

이지의 문학은 위에 나타난 미적 관점을 토대로 완성되었다. 이지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사유 체계를 종합한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동심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동심설

이지는 오랜 시간 성리학을 공부했던 봉건 사회의 유학자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태주학파 중에서도 급진적인 성향을 띄는 인물이었다. 또한 유교·불교·도가사상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삼교귀유설’을 외치며 삼교의 일치성에 대해 주장했다. 심지어 기독교나 회교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이지의 동심설은 마치 그의 통합적인 사유체계를 보여주듯 다양한 사상들이 녹아들어간 종합적인 이론이다.동심설의 동심(童心)이란 말 그대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다. 이지는 어린아이의 마음이야 말로 바로 참된 마음(眞心)이라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성 이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으로 문학을 해야 한다 주장했다. 그는 『서상기』나 『수호전』과 같은 작품들을 참된 정서가 반영된 좋은 작품들이라고 평가했다. 거짓된 도학과 문학을 반대했던 이지는 당시 도(道)를 바탕으로 문(文)이 통제당하는 봉건 사회의 모습을 비판하였다. 그의 저서인 『분서』에서 ‘문장을 이루지 않는 시대란 없고, 문장을 이루지 않는 사람이란 없으며, 일정한 격식의 글을 창작하였을 때 문장이 아닌 경우는 없다. 시는 어찌 옛것을 본받아야만 하겠는가? 글은 어찌 반드시 선진 것이어야만 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시대와 체재에 관계없이 동심에서 우러난 작품이라면 참된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여기서 선진의 것이란 유가의 문학론으로 ‘육경(六經)’,『논어』및『맹자』등을 일컫는다. 그는 경전 해설서인 『사서평』을 통해 성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를 거부하고, 성인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전을 해석하는 대담한 모습을 보였다. ‘무릇 하늘이 사람을 내시면 절로 그 사람의 쓰임이 있는 것이니, 공자에게서 인정받은 다음에야 그 사람의 존재가치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반드시 공자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천고이전에는 공자가 없었으니 결국 제대로 된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았단 말인가?’ 또 위와 같이 말하면서 당시 봉건 사회를 지배했던 유학과 유학자들에 대해서도 거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분서

이지의 대표작인 『분서』(焚書)에는 벗들과 나눈 편지 중 이지의 답장이 실려 있다. 그는 분서의 머리말인 <자서(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요즘 학자들의 폐단에 대해 자못 절실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고질병을 정면에서 꼬집었으니, 그들은 필시 나를 죽이고 싶겠지. 이 때문에 책을 태우려 하였으니, 응당 불태워 없애야 하고 남겨두면 안 되는 사정을 말한 것이다. … 무릇 내 글을 태우려는 자들은 그것이 사람의 귀를 거스른다 말하고, 내 글을 인쇄하고 싶어하는 자들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속으로 쏙 들어온다고 말하는구나. 귀에 거슬린다는 자는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니, 이는 실로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 나이 벌써 예순넷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만 한다면 나를 알아줄 자도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요행을 바란 탓에 나는 이 책을 찍는다.”


작품3

작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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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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