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병제
부병제
부병제는 서위·북주에서 기원되었는데 수당에서도 계속해서 시행되었다. 당은 수의 제도에 의거하여 중앙에 12위를 설치하였다. 위에는 대장군, 장군을 두었고 각 위는 전국 각지의 군부를 통솔하였다. 수 대의 군부는 응양부(鷹揚府)라 하였으나 당 대에는 절충부(折衝府)라고 개칭하였다. 절충부는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상부의 병력은 1200명, 중부는 1000명, 하부는 800명으로 그 장관은 절충도위였고, 차관은 좌우 과의도위(左右果毅都尉)였다. 하부의 편제는 300명을 단(團)이라하여 교위(校尉)가 통솔하였고, 100명을 여(旅)라 하여 여수(旅帥)가 통어하였다. 50명을 대(隊)라 하고, 10명을 화(火)라 하여 대정(隊正)·화장(火長)이 나누어 통솔하였으며, 부병은 ‘위사(衛士)’라 하여 호등이 높고 정남이 많은 군부의 호에서 선발하였는데 21세가 되면 징발되어 군문에 들어가고 60세가 되면 군역을 면제 받아 농사를 짓게 하였다. 부병은 균전령에 따라 토지를 지급받아 평상시에는 생산에 종사하고 농한기에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으면서 윤번으로 수도의 방위에 충당되었는데 이를 ‘번상(番上)’이라 했으며, 전시에는 징발되어 변경으로 출정하였는데 병부에서 어부(魚府)를 내려서 지방 주자사와 군부의 도위에게 주고 부를 맞춘 후에야 비로소 출동시킬 수 있었다. 출동된 병력은 12위 장군의 통제를 받았다. 전쟁이 끝나면 장군은 조정으로 돌아가서 임직하고 병사는 부에 돌아가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처럼 병사는 본업을 잃지 않았고 장수도 병력 장악의 실권이 사실상 없어 군대의 충원이 보장되었고 중앙집권도 유지되었다. 그런데 부병은 일정한 토지를 갖고 물자를 스스로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출정 시에는 양식 및 생활비용을 모두 자신이 조달하였기 때문에 국가는 기본적으로 병사를 양성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따라서 부병은 일종의 병농일치 제도였다.
부병의 배치와 분포로 보면 당조가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수도를 집중 방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경기 부근 지역에 군부가 가장 집중되어 있었다. 사병은 군적이 있어서 마음대로 군부 소재지를 이탈할 수 없었으며, 만일 부를 벗어나 도망치면 형률의 엄격한 징계를 받았다. 당 대 전성기에는 전국 군부가 634개의 소였고 병력이 60여 만에 달했는데, 이 중 관중 지역에만 261부가 있어 총병력의 약 40%를 차지했다.
부병제는 균전제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대개의 부병은 토지를 갖고 의식을 자급하여 생활에 일정한 보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부병의 내원도 고갈되지 않았고 제도도 공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균전제가 파괴되어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고 생활을 보장할 수 없게 되면, 병사도 스스로 의식과 장비를 마련할 수 없게 되어 향촌을 떠나 도망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부병제도 또한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당 대 부병제도는 현종의 개원 시기에 이르러 토지의 극심한 겸병과 사회 빈부의 분화 및 관부의 빈민 착취와 부호 우대 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농민이 병역에 시달린 끝에 대규모로 도망치는 사례가 급증하자 더 이상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정부는 금전을 주고 사병을 모집하는 모병제도로 부병제도를 대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