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부패 운동
개요
부정부패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척결 의지는 일찍이 90년대 장쩌민 정권부터 존재하였다. 장쩌민 정부는 부패척결을 사회주의 건설에서 가장 필수적으로 달성돼야 할 과업 중 하나로 삼았으며, 그 본보기로 1998년에 베이징시 당서기이자 정치국 위원 천시퉁이 부정부패의 죄로 16년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위층 간부의 부정부패 사건을 경험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중앙기율검사위는 부패안건을 전문적으로 전담하는 ‘반부패공작조율 소조’를 2002년도에 조직하게 된다.
이렇듯 부정부패 척결에 관한 움직임은 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본 항목이 포괄하는 반부패 운동의 범위는 2012년, 전 충칭시위원회의 서기 보시라이가 부정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원인으로 몰락한 시점부터 시진핑 주석이 정권을 잡으면서 반부패 정책이 가속화되고있는 2015~2016 시기를 뜻한다.
2010년대 '시진핑 정권의 반부패 운동' 전개
보시라이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가치인 ‘분배’를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충칭모델’을 설계했던 정치가로, 든든한 정치적 출신배경과 가난한 중국 인민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한때 당 내부에서 시진핑에 버금갈만한 위치에 올랐던 중국 공산당의 차세대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기 전에 보시라이와 그의 측근은 심각한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된다.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가 공산당의 개국공신이라는 점과 그의 튼튼한 정치적 입지 때문인지 최악의 판결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후진타오 전 주석에 대한 도청 시도가 발각되는 등 그가 저지른 범죄행위와 비리에 관한 심각성 근거 삼아 무기징역에 처하게 된다[1]. 일각에서는 보시라이가 실각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저지른 부정부패가 아니라,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의 선전가와 기치를 장려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회주의 시기의 가치를 앞세워 지역 서민의 민심을 얻는 일렬의 행동들이, 보시라이의 정적들에게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위협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해석이다.
실각에 관한 실질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보시라이의 실각과 시진핑 주석이 당 총서기가 된 2012년도의 18대 전국대표대회는 중국의 '반부패 정책'에 있어서 큰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 반부패 척결이라는 구호 아래 현재진행형으로 수많은 고위급 당 간부들이 낙마 되고 있으며, 반부패 운동의 성격 역시 앞선 정권과는 판이하다. 이러한 중국의 반부패 정책의 변화를 크게 3가지로 구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부패척결의 대상 범위와 그 숫자가 기타 정권 시절에 비해 매우 증가하였다. 시진핑이 총서기에 취임한 이후 약 2년간 낙마 된 장차관급 고위직 간부의 숫자는 68명으로, 한 해에 34명의 장차관급 간부가 반부패 운동을 계기로 낙마 되었다. 후진타오 시기에 연평균 낙마한 고위급 간부가 2.3명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시진핑 주석이 정권을 잡고 나서 기존 정권과 비교하면 해마다 약 15배 정도의 부정부패 사범들이 검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반부패 조사의 범위가 여러 지방과 기관까지 골고루 퍼져있다는 점 역시 후진타오 정권과는 매우 다른 부분이다. 과거 고위 관료에 대한 당 중앙의 반부패 조사는 당정 기관 및 인대, 그리고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인사와 같이 그 범위가 한정돼 있었으나, 시진핑 정부의 반부패 조사는 지방 정부와 국유기업, 해방군, 매체, 대학연구기관 등으로 확대되어있다.
2.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있어서 끝까지 추궁하며, 척결의 과정에 상한선이 없다. 이전 정권들의 반부패 조사는 대부분 정부(正部)급 이하의 간부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부국(副國) 급 간부가 처벌받는 사례가 극히 드물었던 반면에, 시진핑 정권에서 반부패로 처벌받은 저우융캉, 쉬차이허우, 쑤롱, 링지화 등의 인물들은 모두 부국 급 간부들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그리고 상한선을 두지 않는 반부패 척결운동은 장쩌민과 후진타오 정권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특히 과거엔 정치국 상무위원이 부패 사건에 연루되어도 실제 주변 인물만 조사를 받았으나, 시진핑 정권이 ‘호랑이급 부패 사범’이라 언급한 저우융캉의 경우 전 정치국 상무위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과 본인의 가족 및 측근을 포함한 10여 명의 인원들이 일거에 낙마 되었다.
3. 부패척결에 관한 조사와 행동이 집약적이고 빨라졌다. 최근 4년간 이루어진 반부패 척결의 과정을 살펴보면, 중앙기율위가 조사 대상자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부패 사범들을 척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면, 완칭량(萬慶良) 광저우시위원회 서기는 성 정부의 회의 시간에 체포되었으며, 탄리 하이난(海南) 성 부성장은 골프를 치다가 잡혔으며, 한셴충 안후이성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은 조사가 시작된 당일에 두 건의 연회 약속이 이미 잡혀있는 상태였다. 이는 시진핑 정권의 부패척결에 관한 조사와 행동이 성급 서기와 부주석조차 당 내부의 반부패 조사 흐름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철저하며 또한 신속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총서기가 되고 나서 반부패 운동은 약 4년 동안 진행되고 있지만, 그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2015년 1월의 당 중앙 기율검사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에서 시 주석은 “지난 2년 동안의 청렴 정부 건설과 반부패 투쟁은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감히 부패를 생각할 수도 없는(不敢腐, 不想腐, 不能腐) 수준의 압도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언급하면서 “반부패 투쟁은 당과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성역 없고 전방위적인 무관용(無禁區, 全覆蓋, 零寬容)의 반부패운동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반부패 운동의 지속성과 확장성을 언급하였다. 반부패 운동이 2015년도 양회의 주요안건으로 상정됨으로써 부패 사범에 대한 조사와 척결이 오히려 더 탄력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고강도 반부패 운동과 고위간부의 낙마 사태는 적어도 시진핑 집권 전반기(2017년)까지 이어나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반부패 운동의 의도
일인 독제체제를 위한 초석인가?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외국의 언론들은 시진핑 정권의 반부패 운동이 단순히 당의 청렴도를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며,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 이를 이용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은 시진핑의 부패 척결의 과정을 가리켜 "시진핑 국가주석이 마오쩌둥의 시대로 회귀하려고 한다."라고 비판하였으며, 중국 내부의 부정부패가 심각한 문제임을 인정하지만, 이는 지도자가 아닌 사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이를 정치적 숙청의 수단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였다<ref>리덩후이 "시진핑,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