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개요
배경
전개
제1혁명
1911년 10월 10일 혁명당원들이 무창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전국의 각 성에서 철도 국유화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원세개와 가까이 지내던 관리들은 오직 원세개만이 봉기를 진압할 능력을 갖췄으며 그를 총독으로 삼으라고 주장했고 각 열강들도 원세개만이 혁명군을 소탕할 수 있다면서 압박하였다. 이에 못 이긴 순친왕은 마침내 10월 14일 원세개를 호광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혁명군 토벌 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자신을 해임시킨 순친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원세개는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켜야 명령에 응할 수 있다고 답하였고 혁명군의 기세가 더 거세지자 재풍은 어쩔 수 없이 원세개를 그에게 해군과 육군 지휘권을 넘김은 물론 그를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내각을 조직할 권한을 부여했다. 군대를 인계받은 원세개는 11월 9일 혁명당 악군 총사령 황흥으로부터 함께 청조를 무너트리고 한족 정권을 세우자며 회유한다. 이미 청조에 대한 충성은 있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황제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던 원세개였다. 그는 혁명당의 제안에 기뻐하며 혁명당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지만 입헌군주제 도입을 주장한 원세개의 협상안을 거절한다. 이에 원세개는 지금 당장 협상에 임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우위를 확보한 다음에 협상을 재개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한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혁명군은 무창으로 퇴각한다.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무창 점령 후 3일 뒤 남부 지역의 독립된 성들은 각 성 대표연합회를 구성하고 원세개와 정전하기로 합의한다. 각 성 대표연합회는 무력으로 원세개의 군대를 이기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하였고 그를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청 왕조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가 공화정 체제 수립을 지지할 경우 그를 대총통으로 추대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그 후 원세개와 평화회담을 개시하였고 당소의의 건의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공화정 체제 수립 여부를 결정하자고 하였다. 국민회의는 3차에 걸쳐 개최되었고 양측은 합의에 이르렀으나 손문이 돌아오고 남방 측에서 그를 임시정부 총통으로 선출하자 원세개는 합의안을 인정하지 않았다. 1912년 1월 1일 손문은 남경에서 임시정부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중화민국 건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원세개가 총통을 맡아야 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원세개는 이를 믿지 않았고 한동안 둘 사이의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원세개는 혁명파들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청 왕조를 종식시켜야 했고 청 황실을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원세개는 루이 16세를 언급하면서까지 황실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청 황실은 분노하며 이에 반발했고 왕공 대신들은 평화회담에 반대하는 종사당을 결성하면서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종사당의 지도자인 양필이 혁명당원의 테러에 의해 암살당하자 반대 여론은 쥐죽은 듯 가라앉았다. 손문은 점점 원세개를 압박해오자 양측은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 황제의 퇴위조건에 대해 합의했다. 1912년 2월 12일 융유태후는 선통제의 이름으로 칙령을 내렸고 이로써 마지막 황제 부의는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2천년 넘게 지속되어오던 왕조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제2혁명
바로 그 다음날 손문은 협상안에 따라 원세개를 임시정부 대총통으로 추천하는 교서를 발표했고 이틀 뒤 그는 마침내 임시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되었고 3월 10일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중화민국의 정치체제를 구체적으로 구성하는 정식 헌법이 제정되기 전이었고 ‘중화민국임시약법’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법은 내각책임제를 국가구성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었고 임시 참의원이 설립된 10개월 내에 국회의원 선거를 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임시 참의원은 국회를 양원제로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국회의원 선거를 시행한다. 이 선거에서 이사장 대리 송교인은 열렬히 선거활동을 벌였고 국민당은 참의원과 중의원 양원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되었고 송교인도 참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국민당내에서 매우 촉망받는 지도자였다. 원세개에게 내각책임제 하에서 원내 다수당의 유력한 지도자로 주목받는 송교인은 위협적이었고 원세개는 그가 새로운 내각 구성을 주도하여 자신을 총통자리에서 끌어내릴까봐 두려워하여 그를 암살할 것을 지시하였다. 1913년 3월 20일 송교인은 상하이역에서 총격을 입어 부상당하였고 이틀 후 사망하였다. 국민당은 이 사건의 배후를 찾아내어 엄벌할 것을 주장했고 곧 그 배후는 원세개라는 사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국민당원들은 매우 분개하여 그를 토벌해야한다고 하는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이에 대한 사과는 일절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이런 반발을 빌미로 국민당 세력을 군사적으로 제거할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군 내부에서 국민당 측에 속한 주요 인물들을 해임하고 국민당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문은 군대를 출병하여 원세개를 토벌하기로 결의하면서 ‘2차 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남북전쟁이 재개 되었지만 원세개의 북양군에게 패배하고 말았고 2차 혁명은 좌절된다. 2차 혁명이 진압된 후 원세개는 사실상 원세개 천하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고 끝없는 권력욕으로 가득찼던 그는 이제 정식 총통으로 취임하길 원했다. 그러나 총통 취임은 헌법에 기초한 절차를 따라야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그는 총통 선출을 먼저 해야한다는 여론을 조장하였고 이에 따라 총통 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중의원 회의장에서 총통 선거가 진행되었고 이 회의장은 총통부에서 파견한 군경들이 사실상 포위하고 있었다. 이렇게 강압적 분위기 속에 3차례에 걸친 투표 끝에 원세개는 정식 총통으로 선출되었고 1913년 10월 10일 그는 정식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제3혁명
독재체제
원세개는 점점 더 군주제로 회귀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총통 취임 후 원극정을 휴양을 명목으로 독일로 보내고 빌헬름 2세를 접견하게 했는데 원극정은 빌헬름 2세로부터 중국은 군주제를 시행해야만 한다는 친서를 받아온다. 열강 중 하나인 독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듣자 원세개는 군주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 그에게 의회정치와 정당, 책임내각 등은 모두 장애물로 보일 뿐이었다. 총통 취임 후 헌법 제정을 진행해나가고 있던 헌법기초위원회는 ‘천단헌법초안’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민주공화국의 기초적 제도인 국회의 입법권 등을 규정하고 있었는데 원세개는 이 헌법이 통과되는 것을 어떻게든 저지하기 위해 헌법초안을 공격하는 한편 헌법기초위원회에 자신의 측근을 보내 압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천단헌법초안은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이미 통과되었고 헌법회의에 제출되자 원세개는 국민당을 비난하며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국민을 해친다는 등의 죄로 국민당을 해산시켰고 국민당이 반란을 획책하려 했다며 국민당 의원의 자격을 정지시켰다. 이로 인해 국회 의사정족수가 부족해져 국회를 열 수 없게 되자 남은 의원들은 정부에게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원세개는 각 성의 도독 등으로 하여금 국회를 해산하라는 여론을 조성하게끔 하였고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정치회의는 원세개가 바라던 대로 국회를 해산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고 이를 수용하는 형태로 원세개는 국회 해산 명령을 내리고, 다음 달에는 각 성의 의회를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약법회의가 열려 ‘중화민국약법’이 제정되었고 원세개가 이를 공포함으로써 사실상 원세개의 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법은 총통에게 국회해산권, 외교권, 긴급명령권, 긴급 재정 처분권 등을 부여했고 참의원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같은 해 12월 29일 약법회의에서 ‘총통 선거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종신총통제가 마련되었고 총통직 세습이 가능하게 하였다. 원세개의 의중을 간파한 원극정을 포함한 측근들은 원세개에게 군주제 실시를 더 적극적으로 권유하기 시작한다.
원세개는 일본이 21개조 조약에 동의할 것을 요구해오자 이를 받아들였고 이로써 일본의 지지가 확보되었다고 생각한 원세개는 군주제 도입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각 성의 군벌들을 불러 군주제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 또한 ‘양도’라는 자는 <군헌구국론>을 지어 원세개의 마음을 얻었고 그를 필두로 하여 군주제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주안회’가 구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도는 각 성의 대표와 인사를 끌어들여 ‘공민청원단’이라는 조직도 만들어 군주제를 찬성하는 청원서를 올리게 한다. 하지만 아직 민중이 군주제를 지지한다고 주장할만한 명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와중에 그의 아들 원극정이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원세개에게 전달되는 「순천시보」의 내용을 조작하는 등 일련의 작업을 펼치기도 했고 원세개는 군주제를 도입하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양사이는 전국청원연합회를, 양도는 여성 청원단 등을 조직하여 원세개의 황제 즉위를 재촉했고 참정원에서는 소집기간이 긴 국민회의 대신 국민대표대회를 열어 군주제 시행여부를 결정하기로 한다. 원극정을 포함한 원세개 세력이 주도한 국민대표회의에서 군주제 시행을 투표에 부쳐 승인받는데 성공하고 참정원은 원세개를 황제로 추대한다. 원세개는 이를 받아들이고 황제 즉위식을 준비해나간다. 그러나 운남성에서 군주제에 반대하며 공화정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들은 중화민국 구국군을 조직하여 원세개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 와중에 해가 바뀌어 1916년이 왔고 그는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홍헌으로 삼아 그 해를 홍헌 원년으로 삼았다. 하지만 군주제 시행에 대한 반발은 매우 광범위했고 격렬했다. 우선 군주제 시행에 대한 일본의 지지와 지원을 확보했다는 것은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일본은 21개조 협약이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그의 특사를 거절했다. 또한 각 국 공사들도 군주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거기다 그의 사촌동생인 원서정과 원세동 등 또한 군주제에 반대했으며 원세동은 원세개에 대항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기까지 한다. 또한 운남의 중화민국 구국군은 사천과 호남 지역등을 점령해나갔고 손문이 이끄는 중화혁명군은 광동, 산동, 호남, 호북 등에서 궐기하여 원세개에 저항했다. 또한 각지에 보낸 토벌군도 매수당하거나 연패하자 원세개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회의를 소집하여 군주제를 폐지에 대해 논의하고 모두가 이견 없이 군주제 철회를 선포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3월 22일 군주제 철회 명령서를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