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운동
목차
개요
대약진운동은 1958~1960년 마오쩌둥이 소련식 공업화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한 생산력 증대 운동이다.
시대적 배경
연도 | 사건 |
1953-1957 | 제1차 5개년계획 |
1953.3.5 | 스탈린 사망 |
1956-1960 | 중소분쟁 |
1956 |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 |
1957 | 반우파투쟁 |
1958-1960 | 대약진운동 |
권력의 공고화
- 1953년 과도기의 총 노선의 실현을 목표로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공업화 경험이 부족한 농업국가였고,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소련에 기대어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소련식 모델은 관료주의 문제를 수반했다. 인민을 대표해야 하는 당원들이 특권의식을 내세우는 엘리트 계층을 형성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지식인과 민주당파를 이용해 당내 관료들을 비판하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비판이 점점 폭력성을 띠게 되자 다시 반우파투쟁을 통해 우파 세력을 탄압하였고, 마오쩌둥은 이 과정에서 획득한 절대적 권력을 기반으로 대약진운동을 주도하였다.
연속혁명 사상
- 제1차 5개년계획 공업화의 결과로 경제적인 발전에는 성공했으나 사회적 불평등, 도농격차, 이데올로기의 쇠퇴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도시의 공업화를 통해 경제적 낙후를 극복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 건설과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기 위해 마오쩌둥은 농촌 공업화라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1958년 1월 28일 최고국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의 사상적 기원이 되는 연속혁명론을 제창하면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혁명인 대약진운동이 시작되었다.
중소관계 악화
“ 자력갱생을 위주로 하고, 외국원조를 부차적인 것으로 얻어내며, 미신을 타파하고, 독립자주적으로 공업과 농업 그리고 기술혁명과 문화혁명을 하며, 노예사상을 타도하고, 교조주의를 매장하며, 진지하게 외국의 좋은 경험을 학습하고, 반드시 외국의 나쁜 경험을 연구하여 조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노선이다.[1]
” — 1958년 마오쩌둥
내용
목적
소련식 공업화가 초래한 도농불균형 현상과 도시의 실업, 농촌의 불완전고용 문제 등의 사회∙경제문제를 새로운 경제전략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새로운 경제전략이란 바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던 농민대중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철강, 화학, 기계제조 같은 자본집중적 공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더 빠르게, 더 좋게, 더 싸게” 발전하는 것이 대약진 운동의 목표였다.
전개
경제
- 권력하방정책
대약진운동 시기동안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많은 권력을 넘겨주었다. 지방정부는 중앙으로부터 일부 기업에 대한 계획 관리권과 기본건설항목 심사권, 재정세수 관리권, 노동관리권 등을 이양받았고 전체기업이윤의 20%를 소유하게 되었다.
- 철강증산운동
1957년 중국의 철 생산량은 534만 톤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시기에 생산량의 두 배를 증산하여 1,070만 톤을 생산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도시·농촌 전 지역에 약 60만 개의 토법로가 설치되었으며 9,000만여 명이 철을 제련했다. 집집마다 철제 솥이나 철문을 녹였으며, 아이들은 폐철을 구하러 다녔다. 또한 토법로를 가동하기 위해 엄청난 벌목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산림이 파괴되었다.
- 수리건설운동
특히 1957년부터 6천만~7천만 명이 동원되어 농촌에 댐을 건설하였다. 대규모 관개수리시설을 건설하면서 여러 마을의 농민들이 하나의 생산대와 생산대대로 조직되었다, 한 마을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한 생산대를 이루고, 10개의 생산대가 모여 하나의 대규모 생산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엄격한 규율과 근대적 공장의 노동조직과 보상제도에 기초해서 작업하였고, 생산대대 간의 작업을 자치적으로 정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자족적인 경제∙사회∙정치적 단위인 인민공사의 성격을 지녔다.
사회
- 인민공사화운동
1958년 8월 마오쩌둥이 허난성에서 시행되고 있던 인민공사를 시찰하고 난 뒤, 베이따이허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인민공사 설립을 결의하여 전국적으로 인민공사화가 진행되었다. 인민공사는 기존의 농업합작사를 더 큰 규모로 개조시킨 것이다. 하나의 말단 지방정부와 같이 농공업∙교육∙사회복지∙공공사업∙군사방위 등 다양한 기능을 인민공사 내에서 수행하였다. 농민들의 토지, 가축, 가옥, 농기구 그리고 합작사에 대한 지분까지 모두 공동소유가 되었고, 농민들은 의식주와 더불어 의료와 교육을 보상 받았다. 1959년 봄까지 26.000개의 인민공사가 건설되었다.
교육
- 농촌교육제도
한계와 결과
철강증산운동이나 수리건설운동에 노동력이 투입되면서 농업 생산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식량생산량이 목표액에 미치지 못했다. 또한 인민공사 내에 식량∙자재 등의 낭비와 같은 비효율성 문제가 발생하였고, 수단의 공유화는 농민의 생산의욕을 저하시켜 농업생산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동안 연속 재해까지 겹쳐 수천 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책임지고 류사오치에게 주석직을 넘겨준 뒤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국가 주석직을 물려받은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악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조정정책을 실시한다.
평가
수정주의자
류사오치나 덩샤오핑 등의 수정주의자들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근본 방침이나 방향의 잘못으로 보고, 중국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 활동을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나 이익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원인을 혁명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 부족이라고 보았다.[3]
참고문헌
-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파주: 서해문집, 2004.
- 장병옥 외, 『중국학개론』, 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2.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 김수영 역, 서울: 이산, 2004.
- 첸리쥔,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 연광석 역, 파주: 한울, 2012.
- ↑ 毛澤東,「關於向軍委會議印發李富春第二個五年計劃要點報告的批語」(1958.6.17)『建國以來毛澤東文稿』第7冊,p.273. 첸리쥔,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 연광석 역, 파주: 한울, 2012, p.289. 번역 인용
- ↑ 장병옥 외, 『중국학개론』, 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2, p.32
- ↑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