刑
語源
刑은 곧 刑罚이다. 특히 죄인을 처벌하는 것을 가리킨다. 갑골문에서 刑자는 사람이 감금되어 목재의 죄수를 가두는 형구에 있는 모양을 상형했다. 따라서 죄인은 죄인을 압송하거나 감금할 때 쓰던 우리에 갇혀 대중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 돌려졌는데 이것은 고대에 죄인이 체벌 받는 한 방식이었다. 금문에서 刑자의 사람의 형상이 우리 밖으로 나와 칼의 형상으로 잘못 변화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형상은 “井”자에 가까워졌다. 소전의 刑자는 刀를 따르고 井을 음으로 하는 형성자로 잘못 변하였다.
文化
형틀과 형벌용 칼을 그렸다. 전서에 점이 들어간 건 형틀이 우물로 와전됐기 때문이다. 우물을 짠 나무틀의 모습을 상형하였으며 가운데 점은 두레박의 상형이다.[1] 중국 역사에는 역대의 혹형이나 그 밖의 잔인한 행위는 그 종류의 다양함, 방법의 잔인함, 피해자 측의 비참함 등이 특징이다. 육체와 정신을 마구 짓밟는 각종 비술과 절묘한 기술이 고안되었고, 그것들을 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잔혹성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혹형이 법전에 명기되었다는 것은, 노예시대에서 봉건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통치자의 지배 수단으로써, 형법 안에 잔혹성을 갖추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게다가 중국 역대 혹형의 대부분은 법 밖의 형 또는 위법적인 형이었다. 각 시대의 통치자-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현청까지-들은 정적의 처치나 모반의 진압에서 시정의 범죄 단속에 이르기까지, 죄인을 고문하는 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망설임도 없이 온갖 형벌을 적용했으며 법률의 구속도 받지 않았다. 법 밖의 형이 무수히 존재했고 또한 무한정으로 범람한 것은 봉건주의 사유체계 및 정치제도와 직접 연관이 있다. 통치 계급의 정신적 지주로서 유가의 학설은, 君臣父子의 윤리관념에 따라 준엄한 질서 체계를 정하고 있다. 상급자는 하급자에 대해, 연장자는 연소자에 대해 명령하고 지배하며 생사권을 쥐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하급자나 연소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반항한다면 대역 무도의 무리로 간주되었다. 이 뿌리 깊게 굳어진 윤리관이야말로 봉건 정치의 기본 특징이 전제적인 통치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2] 설문해자에서 “刑은 칼로 우물을 지키는 것이다. 물 마시려는 사람이 우물에 들어서서 냇물에 빠지니 칼로 지키고 그 情을 끊었다”라고 하였다. 의미인즉 칼을 가지고 우물을 지켰다는 뜻이다. 우물의 물을 마시러 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종종 우물에서 물을 다투었다. 그 결과 분분히 우물에 빠지게 되었다. 칼을 가지고 한쪽에서 지키자 사람들이 두려워서 함부로 물을 다투지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으므로 질서가 잡혀지게 되었다. 이것이 법률, 형벌이 확정된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최초에는 물을 다투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이 바로 민사소송사건의 시작이라고 하겠다. 程樹德은 『설문계고편』에서 이 자의 옛 의미를 인식하였는데, 실로 잊혀진 고대사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대사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칼로 우물을 지키는 以刀守井이 형자 구성의 특징이자 그 귀한 고대문화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