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싱
황싱(黃興) | |
---|---|
| |
출생 |
1874.10.25. 호남성 장사(湖南省 長沙) |
사망 |
1916.10.31. 강소성 상해(江蘇省 上海) |
관련 활동 | 혁명운동가 |
개요
황싱은 한족 출신으로 본명은 쩐(轸)이나 후에 싱(兴)으로 개명했으며, 자는 크어치앙(克强)이다. 중국의 근대민주혁명운동가로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지휘했으며 우창봉기에서는 혁명군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이후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임시정부에서 임시 대총통 쑨원 밑에서 육군총장(육상)에 취임했으며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지도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크어치앙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쑨원과 함께‘쑨황(孙黄)’이라고 불렸다. 저서로는 《황극강선생전집(黄克强先生全集)》, 《황흥집(黄兴集)》, 《황흥미간전고(黄兴未刊电稿)》 및 《황극강선생서한먹적(黄克强先生书翰墨绩)》이 있다.
생애
청조를 전복하여 중국에서 2,000년간의 황권 지배를 종식시킨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주역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화흥회(華興會)를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청조를 전복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몇 차례의 성급한 혁명 시도 이후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혁명지도자 쑨원(孫文)은 모든 중국 혁명조직들을 묶어 중국동맹회(同盟會)를 조직했는데, 황흥은 이 조직에서 쑨원에 이어 서열 2위였다. 6년 후 황흥과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 정부군 내부 동조자들의 지원을 받아 중국 남부도시 광저우(廣州)를 공격했다. 이 작전에 참여했던 여러 집단들간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중국 혁명 역사에 가장 높이 평가되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광저우 봉기(황화강 사건)는 실패로 돌아갔다.
1911년 10월 10일 중국 중부 우창(武昌)에서 혁명군 장교집단이 혁명을 시작하여 중국 남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유럽에 있던 쑨원과 함께 이 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던 황흥은 우한(武漢)으로 서둘러 가서 혁명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중국 중부도시 한양(漢陽)을 방어하여 정부군을 3주 동안이나 묶어놓음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혁명군이 조직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했다.
1911년 12월 2일 혁명군은 중국 남부 난징(南京)을 점령하여 그곳을 혁명세력의 수도로 삼았다. 같은 해 12월 14일 지방 혁명정부를 구성한 대의원들은 황흥을 새 공화국 총통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그는 총통직을 수락하지 않았으며, 2주 후 쑨원이 귀국하자 그를 임시 대총통으로 뽑았다. 1912년 3월 쑨원은 자신의 총통직을 사임하고 이전의 만주군 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양보했으며 수도는 베이징(北京)으로 옮겼다. 황흥은 총리와 군사령관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계속 거절했다. 대신 자신의 군대를 해체하고 동맹회를 의회주의 정당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1913년 위안스카이가 의회나 새로 구성된 정부와 협조할 의사가 없음이 명백해지자 그는 쑨원과 함께 제2혁명을 조직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혁명군을 격파했으며, 황흥은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 해 10월 31일 상하이에서 병사했다.
주요 업적
화흥회(华兴会) 조직
청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조직된 반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혁명단체로, 황싱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장사(長沙)에서 천티엔화와 장사 출신 일본 유학생 500여명을 모아 조직했다. 화흥회는 호남성(湖南省)의 비밀결사와 협력해 장사에서 무장봉기를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실패했다.비록 화흥회가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화흥회는 중국 내륙에서 첫 번째로 조직된 지역성을 띄고 있는 자본계급혁명단체로 기타 혁명 단체 조직을 촉진시켰으며 전국 통일의 자본계급혁명정당의 조직을 마련하기 위한 초석을 놓는 역할을 했다.
중국동맹회(中国同盟会)
1905년 7월 30일, 쑨원과 황싱은 각 성(省)에 사람을 보내 혁명에 관심 있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도쿄에서 진행하는 통일혁명 단체 조직 기획회의에 초대했다. 여기에는 흥중회(兴中会)와 화흥회(华兴会), 광복회(光复会) 및 일본에서 유학중인 기타 조직에 참가 중인 구성원들 등 70여명이 포함되어있었다. 회의에서는 중국동맹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고, 쑨원은 “만주족을 내쫓아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을 창립하며 지권을 균등하게 할 것.(驱除鞑虏,恢复中华,创立民国,平均地权)”을 목적으로 삼았다. 황싱은 당시 회의에서 혁명의 대의를 강력하게 외쳤으며 동맹회 규약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같은 해 8월 20일, 동맹회는 정식적으로 도쿄에서 성립되었으며 이는 저항운동 비밀결사의 이름으로 한족(漢族)의 애국지사, 사회주의 활동가, 공화주의자들이 공동의 목표 아래 백여 명이 참가했다.
1906년 싱가포르에 지부가 결성되었고 나중에 1911년 청조(淸朝)가 타도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설립되자 1912년 8월 중국 국민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