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오치
류사오치(刘少奇, Liú Shàoqí, 유소기) 파일:류사오치1.jpg 출생 : 1898년 11월 24일 ~ 1969년 11월 12일
출신 : 허난성
-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 중국공산당 지도자
<Career>
(1) 1949 - 1954 : 중국정부의 임시부수반
(2) 1954 - 1959 : 중화인민공화국 제1대 전인대 상무위원장/중화인민공화국 국가부주석
(3) 1959 - 1969 :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국가주석
(※ 1959년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 실패로 물러나자, 류사오치가 제2대 국가주석/당군사위원회주석 임명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마오쩌둥과 수시로 갈등)
(4) 1968년 : 문화대혁명으로 실각
<일생>
- 허난성 카이펑 출생
- 1913년 창사의 주셩중학 졸업
- 1920년 소련으로 유학
- 1921년 중국공산당 가입
- 1922년 중국에서 노동운동
(제1차 국공합작 붕괴)
- 후베이성과 상하이 당조직 수반
- 1927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2년 푸젠성 당비서
<마오와 류사오치>
마오쩌둥이 주로 농촌 유격전을 통한 혁명활동을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류사오치는 주로 도시에서 노동운동과 지하운동을 통한 혁명활동을 이끌었다. 류사오치는 대장정에 참가했고, 쭌이 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쩌둥이 지도력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장정후 산시성에 세력을 확보하고 화북지역 당서기를 맡아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에는 공산당 5인 비서중 한명으로 뽑혔다.
<류사오치 국가주석>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앙정부 부주석을 맡았고, 1956년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58년 마오쩌둥이 펼친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 경제위기 도래/2천만 명이 넘는 기아자, 사망자/ 발생으로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에서 사퇴한다. 이어 국가주석/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오른 류사오치는 대약진운동의 충격을 극복하고자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하며 마오를 비판하였다. 또한, 덩샤오핑, 화궈펑과 손잡고 경제정책을 이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에 따라 마오와 수시로 갈등이 생겼다.
<류사오치 실각>
마오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류사오치는 홍위병의 표적이 되어, 주자파(친자본주의)의 우두머리라는 비판을 받고 1966년 당 부주석에서 물러난다.
1968년에는 당에서 제명당하고, 베이징에서 가택연금상태에 처한다.이해 7월 18일에는 홍위병이 자택을 습격하여 폭행과 폭언을 당한다. 이후 카이펑으로 옮겨져 당뇨/폐렴등의 지병으로 1969년 11월 12일 사망하였다.
<사후복권>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80년 류사오치의 명예 또한 회복되었고, 모든 당직도 사후 복권되었다. 이후 마오와 류사오치 모두를 존경하는 덩샤오핑에 의해 1981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무죄로 인정되어 류사오치의 사후복권이 전격 선언되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4인의 “건국의 아버지”로 중국 지페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