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호묘
개요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호의 묘로 하남성 안양의 은허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부호는 누구인가?
부호는 무정 왕의 부인으로 33살의 나이에 죽었다. 부호는 60여 명의 비중에서 세 명인 왕비였으며, 그리고 그 중에서도 첫째 위치에 있었다. 부호의 아들 둘은 상의 23대 왕과 24대 왕이 되었다. 묘호는 ‘신(辛)’으로 이를 따 비신, 후모신이라고도 부른다. 무정왕은 부호를 지극히 사랑해 부호에 관한 기록이 발굴된 1만 편의 갑골 중 200개가 넘을 정도였다. 또한 부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향당을 지었다고 한다. 왕은 부호의 임신, 출산, 질병과 치유 등의 상황을 점으로 물었다. 특히 그녀가 출산한 자녀에 대한 길흉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부호는 진취적이고 용맹스러운 인물로 은허 시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주도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녀의 삶은 짧았지만 다방면에 걸친 활약상으로 당대의 슈퍼우먼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부호는 왕을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제사의 주재는 왕이 했지만 왕의 명령에 따라 거의 모든 제전을 주관하면서 신의 딸로써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정인으로써 귀갑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귀갑은 외지에서 공물로 들어온 것이었고, 귀갑을 관리하는 것은 소수의 정인들만이 할수 있는 일이었다. 부호는 중국 역사상 기록이 있는 최초의 여장군이었다. 장수로써 13,000명이 넘는 병사들을 이끌고 사령관으로 전쟁에 참여해 적을 무찔렀다. 이때 기록으로 남아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매복전을 펼친 것으로 갑골에 기록되어 있다. 갑골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부호는 군대를 매복시켜 두었다 함정에 빠진 적을 섬멸한 것으로 나온다. 상나라의 가장 강한 적국이었던 강방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수십개의 방국과의 전투에 출전해 20여 개의 방국을 점령했다. 당시 무정왕은 70이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부호가 무정의 권력을 대신해 각종 정벌에 나섰다. 그리고 상대 당시 봉지제도 하에서 봉지를 하사 받아 다스렸고, 왕은 부호가 왕을 알현하러 오는지 점을 쳐서 묻기도 했다. 그 외에도 왕의 동족 죄인을 잡을 수 있는 권한, 나라의 원로들을 만날 수 있는 권한 등 고대 사회에서 엄청난 위치에 올라있었음이 묘에서 발굴된 갑골문을 통해 밝혀졌다.
부호묘의 발굴과 그 가치
1976년 은허 소둔촌의 북서쪽 묘에서 발굴되었다. 부호묘는 지하 9층으로 되어있다. 부호묘는 지상으로부터 1층이 1m 아래, 가장 지하에 관이 있는 곳은 7.5m 아래에 있다. 가장 지하인 9층에는 무려 1,000여 점의 청동기, 옥기 등의 부장품이 있었다. 이외에도 16명의 시종과 호위병이 6마리의 개와 함께 순장되었다. 부장품에는 청동기와 옥기 이외에도 석기, 보석기, 골기, 도기 등 총 1,926점의 유물이 있다. 또 당시 화폐로 쓰였던 조개껍질이나 호신부로 사용된 조개류가 발굴되었다. 부호묘는 전혀 도굴되지 않은 채 가장 귀하고 정교한 부장품이 발굴된 묘였다. 상대의 묘 중에서 유일하게 묘주의 신분과 매장 연대를 알 수 있는 묘로 그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부호묘에서 발굴된 기물들은 부호의 생활상과 그녀의 미적 감각, 당시의 의관, 장신구, 머리모양, 신분에 따른 인물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들이다.
참고문헌
신영자, 갑골문의 비밀 갑골문과 무정 왕, 그리고 부호 왕비, (도서출판 : 문), 2011, 73~9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