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B.C.200-B.C.154
하남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상학(申商學)과 [유가]사상을 공부하였다. 문제 시기 태자가령(太子家令)으로 태자 계(啓,경제)를 가르쳤으며 경제 즉위 후 좌내사(左內史)로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흉노에 대한 대책으로 병사론(兵事論)과 사민실변책(徙民實邊策)을 제시하였고 제후국에 대해서는 가의의 중건제후정책(衆建諸侯政策) 보다 더 급진적인 삭지정책(削地政策)을 건의하였다.
삭지정책(削地政策)은 제후왕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봉지 일부를 몰수하는 정책으로 경제는 이를 추진하였다. 삭지정책은 제후국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오초칠국의 난으로 귀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난을 멈추기 위한 경제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조조는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