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군
평원군(平原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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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승(赵胜) |
출생 |
? |
사망 |
B.C 251 |
생존시기 | 전국시대 |
관련 활동 | 정치 |
평원군(平原君)의 본명은 조승(赵胜)(?~기원전 251년), 전국시대의 사군자(四公子)중 한 명으로,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의 아들이자, 혜문왕(惠文王)의 동생이다.
개요
평원군(平原君) 조승(赵胜)은 전국 시대의 네 공자 중에서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었다. 평원군은 사람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였기 때문에 그 밑으로 모여든 빈객이 수천 명에 달했으며, 친구관계도 매우 좋았다. 그러나 서민들에게는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후에, 그의 문하에 있던 한 사람의 제안으로 인하여 서민들에게도 예의를 갖췄으며, 더욱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조승은 혜문왕 때 처음으로 재상이 되었고, 혜문왕이 죽은 후, 효성왕 때에도 재상을 지냈다.
사마천은 평원군이 다른 사람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이웃 나라에 명망을 떨친 점에서 “평원군은 혼탁한 세상에서 새가 하늘 높이 날듯이 재능과 지혜가 있는 훌륭한 공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모한 사람이었음을 묘사한 부분도 많다.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을 처음에는 두둔하다가 1년이 지나 빈객들이 점점 떠나간 뒤에야 그녀를 죽여 빈객들이 다시 모여들게 한 일이라든지, 모수를 무능한 인물로 평가했다가 그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 것 등이 그러한 예이다.
주요 사건
위제를 도움(营救魏齐)
진 소왕(昭王) 41년(기원전 266년), 위(魏)의 재상 위제(魏齐)가 진(秦)의 재상 범저(范雎)와 적대하다 도망쳐 겁에 질려 평원군에게 왔고, 다음 해에 평원군의 집에 그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진의 소왕(昭王)은 평원군을 진으로 초청해, 범수가 위재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게끔 위제를 죽이지 않으면 진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라며, 평원군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평원군은 이를 거절했지만, 효성왕은 위제를 죽이기 위해 병사를 보냈고, 위제는 겁에 질려 도망치다 위로 돌아왔지만, 신릉군이 만나기를 주저한다는 말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후, 평원군은 귀국할 수 있었다.
모수자천(毛遂自荐)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는 평원군을 보내 초나라에 도움을 청하도록 하였다. 평원군은 식객과 문하 중에서 용기와 힘이 있고 문학적 소양과 무예를 두루 갖춘 사람 스무 명과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19명을 뽑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뽑지 못하였고, 이때, 문하에 있던 모수라는 이가 자신을 추천하였다. 평원군은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문하에 3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나도 들은 적이 없소. 이는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니 같이 갈 수 없소.”라며 거절했지만, 모수는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좀 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었다면 끝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라며 답했고, 결국 합류하게 되었다. 초나라에 도착해서, 평원군이 초나라와 합종하기 위하여 그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이야기하는데, 결정을 못 내리자, 모수가 당 위로 올라 초나라 왕에게로부터 합종을 받아냈다. 그리고 피를 나누어 마셨다. 평원군은 이후 조나라로 돌아와 말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모 선생은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이나 대려(구정은 우임금이 만든 것으로 삼대 때 나라의 보물로 전해졌고, 대려는 주나라 왕실 종묘에 있던 큰 종을 말한다. 구정과 대려는 모두 고대에 나라의 권력을 상징하던 가장 귀중한 물건으로, 여기서는 모수가 비중이 큰 인물임을 비유한 것이다.) 보다도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군사 100만 명보다도 강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모수를 상객으로 삼았다.
한단을 구함(邯郸解围)
효성왕 7년(기원전 259년) 장평대전 후에,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해 상황이 매우 위급해지자, 조나라 왕은 그를 위(魏)와 초(楚)에 파견해 지원을 요청하였다. 효성왕 9년, 그의 문하에 있던 모수(毛遂)가 자원해서 조승과 같이 초나라에 가서 지원을 요청했고, 추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의 원조를 받아 조나라를 지켜냈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한단 내의 병사 식량이 다 떨어져, 조승은 자신의 재산을 거의 다 나눠주어서, 병사를 동원하여 도시를 방어했다. 곧바로, 추의 군대와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의 지원병이 도착하였고, 진나라의 포위를 격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