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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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출생 1215년 9월 23일
사망 1294년 2월 18일
생존시기
칭기즈 칸의 아들 톨루이의 넷째 아들이다. 성은 보르지긴, 이름은 쿠빌라이, 죽은 후 원 세조로 추증되었다. 형인 뭉케를 도와 구육 칸의 사후 뭉케를 칸으로 등극시켰다. 그 이후 뭉케의 지시에 따라 남중국 정벌에 참여했다가 갑작스러운 뭉케의 죽음에 스스로 쿠릴타이를 열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동생인 아릭 부케가 독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칸을 선포하자 그와 칸의 자리를 놓고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전쟁의 과정에서 서쪽의 주치 울루스와 또 다른 동생인 훌레구의 울루스에 정치적 독립을 약속해줄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수도를 초원지대의 중심에 위치했던 카라코룸에서 상도로 옮기고, 겨울용 수도인 대도(지금의 베이징)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복지에서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귀족들에게 호구를 분배해주었다. 그리고 중서성과 파견 기관인 10여 개의 행중서성을 설치하면서 이들을 통해 국가를 통치했다.
쿠빌라이의 시대에도 정복은 계속되었다. 일본 정복을 세 차례 시도했으나 일본인들이 카미카제라고 부르는 태풍의 영향으로 군대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면서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외에도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정글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과 청야 전술에 패배했다. 이후 카이두의 반란으로 남방지역에 위치한 병력들이 초원으로 집중되면서 칸 울루스의 확장은 중지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카이두의 반란은 쿠빌라이가 죽을 때까지 진압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계속해서 초원 지대에 공급되는 물품을 차단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들을 초원지대로 배치시켰다. 한편 이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상태에서 1287년 동방 울루스들의 맹주인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쿠빌라이는 73세의 나이에 직접 몸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친정을 감행해 반란을 진압했다. 그 후 1294년 대도에서 사망했다.

참고도서

  •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