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京
남경의 고대
남쪽의 서울, 난징은 6000여 년의 문명사와 근 2500년의 건설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 저명한 역사적, 문화적 도시로서 중국 4대 고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아마존 강, 나일 강과 함께 세계 3대 강으로 알려진 양쯔강(장강)은 남경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그 양쯔강 덕분에 장강 삼각주와 화동지구에는 경제, 문화, 금융, 상업, 무역 중심의 여러 도시들이 있는데 남경 역시 그 도시들 중 하나이다. 남경이 한 나라의 수도로 역사에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바로 삼국시대부터다. 당시 남경은 건업(建業)이라는 이름으로 오(吳)의 수도로 번성했다. 양한(兩漢)시대의 수도였던 낙양(洛阳)과 장안(長安)과는 거리가 있었고, 또 그 거대하고 화려한 규모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당시 건업은 일국의 수도로 충분히 기능하고 있었다. 현재 남경의 청량산(清凉山)에는 이 시기의 유적인 석두성(石頭城)이 남아 있다. 더불어 중원의 혼란함은 그 지역에는 극심한 피해를 주었지만, 도리어 강남 지역에는 중원의 난세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치적, 문화적으로 소외되어있던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건업을 거점으로 한 오나라는 280년 서진(西晉)에게 멸망당하기 전까지 강남(江南)칭해지는 현재의 강소(江蘇) 일부와, 절강(浙江), 강서(江西), 복건(福建), 광동(广东) 일부, 광서(广西) 일부, 호남(湖南) 일부, 호북(湖北) 일부에 영향권을 미치는 큰 세력권을 가진 국가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경
서진(西晉)의 중원 통일로 삼국시대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치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북쪽의 유목민들은 중원으로 침략하여 소위 5호(胡)16국 시대라 불리는 유목 왕조 시대를 열게 되었다. 자연스레 중원에 자리 잡은 서진은 남진을 거듭하여 현재의 남경에 다시 도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은 북쪽의 유목 왕조와 남쪽의 한족(漢族)왕조가 들어서는 남북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서기 220년 한(漢)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조비(曹丕)의 위나라부터 이 시기를 아울러 크게 위진남북조 시대라는 이름으로 칭한다. 남경에 자리를 잡은 동진은 다시 그 이름을 건강(建康)으로 고친다. 역사 상 두 번째로 남경이 한 왕조의 수도가 된 순간이었다. 이때 역시 수많은 북쪽의 귀족들이 남쪽으로 대피했다. 따라서 본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재지호족(在地豪族)들과 북래귀족(北來貴族)들은 자연스레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진은 북쪽에서부터 온 귀족들의 봉토를 전부 상실했기 때문에 새로이 군현을 설치하여 이들로 하여금 남쪽에서 살아가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을 교군(僑郡)과 교현(僑縣)이라고 하며 이러한 체제를 일러 교구(僑舊)체체라고 한다. 하지만 체제의 안정을 꾀하며 남쪽에서 다시 재기를 노리던 동진 왕조는 생각보다 그 수명이 길지 못했다. 그 뒤를 이어 나온 남조의 4왕조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역시 중국 역사 상 단명한 왕조들로 꼽힌다. 위진남북조의 혼란한 시기가 지나고, 수(隨), 당(唐)의 기간에 남경은 금릉(金陵)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당나라 관리이자 시인이였던 유우석은 금릉의 유적을 둘러보고 「금릉오제」를 읊기도 했다. 지금도 남경의 별칭은 금릉으로 남경의 음식 중 ‘금릉고압(金陵烤鴨)’에도 금릉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당이 멸망하고 다시금 5대 10국이라는 혼란한 시기가 도래했다. 10국 중 한 국가인 남당(南唐) 역시 남경에 도읍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명대의 남경
남경이 다시 수도가 되기까지는 400여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안휘(安徽)의 농민 출신인 주원장은 당시 군벌인 곽자흥(郭子興)의 군문에 들어가 이내 그의 후계자로 발탁되었고, 급기야 곽자흥의 양녀인 마씨와 혼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마씨가 바로 주원장의 태후가 되는 마황후이다. 이후 주원장은 각기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장사성(張士誠)과, 진우량(陳友諒)을 차례로 격파하고,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남경에 도읍했다. 하지만 남경이 명의 수도였던 기간은, 태조 홍무제와, 건문제(建文帝 : 1398-1402) 까지의 2대, 약 40여년이 채 못 미치는 기간 이었다. 이후 영락제는 초원으로 돌아 간 원(元)의 잔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경으로 천도했고, 이때부터 응천부는 현재의 이름인 남경으로 불렸다.
청대와 태평천국의 남경
당나라 이후, 중국의 왕조들은 대부분 폐쇄적인 외교를 추구했는데, 이런 자발적인 소외가 중국 역사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청 역시 중국 외부 세계의 급격한 변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1842년, 몇 백 년 만에 개방을 했지만, 자발적인 개방이 아닌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적인 개방이었다. 그것은 바로 제1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영국과 맺게 된 난징 조약의 결과였다. 남경에서 맺어진 이 비참한 조약을 통하여, 청은 서구 열강들에게 강제로 개방되었고, 동시에 세계 근대의 흐름에 강제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렇게 중국의 근대는 남경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중국은 아편에 전국이 찌들게 되었고, 아편 구매 때문에 국고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라가 궁핍해지니, 관리들의 수탈과 비리는 점점 심각해 갔고, 국가의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이 절정에 이르러 중국의 최초의 근대혁명이라고 불리는 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났다. 태평천국운동은 홍수전의 주도 하에 광동지방에서 시작되었지만, 남경을 점령한 뒤, 천경(天京)’이라 개명시키고 남경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 후 태평천국은 천경을 수도로 15년간 유지되다가 결국 청조에 의해 진압 당하게 된다. 남경의 총통부에 가면 당시 태평천국의 지도부였던 홍수전과 양수청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남경은 태평천국운동의 근거지로서 다시 중국 근대의 중심의 역할을 했다.
중화민국의 남경
그 이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난징에서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강력한 군사세력인 북양 군벌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취임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중화민국의 베이징 정부가 탄생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권력을 이용하여 황제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정권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쑨원이 죽은 뒤, 장제스는 쑨원의 뒤를 이어 중국국민당을 이끌었다. 쑨원은 북경 정부를 무너뜨리자는 북벌을 주장하면서 북진하였는데, 이러한 맥락 속에서 다시 국민당의 수도를 남경으로 옮겼다. 그 후 남경은 중화민국의 수도의 역할을 한다. 중화민국의 수도인 남경의 흔적도 총통부에서 볼 수 있다.
난징 대학살
이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해서 일본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민당의 세력에 비해, 공산당의 세력은 미약했기 때문에 일본은 국민당이 주적主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국민당의 근거지인 남경을 점령하고 민간인과 포로에게 무차별 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 일본인은 당시 6주에 걸쳐서 무차별 살인과 각종 범죄들이 저질렀는데 그 기간동안 남경의 피해자는 약 30만명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바로 ‘난징대학살’이다. 이러한 일본군의 잔인한 행각과 남경의 슬픈 역사는 남경에 자리한 난징대학살기념관에서 자세히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