管仲变法:两千多年前的“凯恩斯主义" - 관중의 변법 : 2천년 전의 "케이즈주의"
머릿말
중국 역사의 경제 개혁은 기원전 8세기의 춘추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기 이전, 중국은 "천하"라는 개념만 존재하였을 뿐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천 여명이 넘는 제후들은 주나라 천자에게 땅을 봉분받아, 질서를 지키며 다툼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이 당시 이들에게는 변화에 대한 어떠한 동기도 열망도 없었다. 하지만 기원전 771년, 주나라 유왕이 견융에게 죽고 서주가 멸망을 하고 난 뒤부터는 상황이 바뀐다. 천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각 제후들은 싸움을 시작하여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되려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다. 공자는 이 당시 사회를 "예법이 무너지고 즐거움이 파괴된"로 말하였지만, 우리는 이 시기를 '개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라는 관점으로 볼 수있다. 본디 국가라는 것은 피비릿내 나는 경쟁의 산물이지 이기에... 이는 어느 세계의 역사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다.
통치자의 정책을 분석해본다면, 2천여년 간의 경제 개혁은 천년을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춘추시대부터 12세기의 북송시대까지의 개혁들은 늘어나는 수요의 충족을 기본 베이스한 개혁들이었다. 반면 북송 이후부터 18세기초의 "강건성세"(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의 청나라 최고 전성시기)까지는 변화보다는 안정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근현대의 경우 양무운동부터 현대까지 구망(救亡), 확장, 안정, 그리고 다시 확장, 이후의 안정이라는 양상을 띤다. 대부분의 개혁들이 "확장"과 "안정"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은 우리가 주목해 볼 만 하다.
춘추시대의 "춘추오패" 중, 첫 패자는 제나라의 환공이었다. 제나라는 강하고 번영했었으며 중국 역사 속 경재개혁의 첫 장을 열었다.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황하 중류였었다. 하지만 제나라는 개혁개방 초기의 광동, 복건, 띠샤(地狭), 빈하이(滨海) 처럼 중앙정부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교주반도에 위치해 있었다.(이는 제나라의 개국자인 강상공이 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봉 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중국 최초 경제 개혁의 시작은 "사상이 자원보다 중요하다"라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나 흥미로운 점은, 제나라 환공이 스스로 "나는 잘 먹고, 여색을 좋아하며, 농사를 좋아한다"라는 허풍을 떨고 다녔을 정도로 원래부터 원대한 보푸를 지니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는 점과, 이렇게 패자의 자격이 없었던 제환공의 옆을 관중이 보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중은 과거 전쟁에서 도망친 패잔병이자 실패한 상인이라는 전력이 있었다. "세 가지를 좋아하는 선생"과 실패한 상인은 함께 손을 잡고 중국 경제 개혁 역사의 첫번째 장은 완성시켰는데, 이는 아마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경제 대개혁일 것이다.
被严重误读的“士农工商”
사농공상에 대한 오해
산업혁명 이전 역사에 존재하던 경제 정책의 기조는 중농주의와 중상주의 2개 뿐이었다. 하이에크는 동양과 서양의 초기 문명들은 모두 농업을 중요시하고 상업을 천대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는데 서양에서는 플라톤을, 중국에선는 맹자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리스의 사상가인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국민을 3가지 계급으로 나누었다.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철학가였고, 두 번째 계급은 전사들이었다. 세번째 계급은 상인과 수공업자, 그리고 농민이었다. 유가의 맹자는 상인들을 무시하였으며 그들을 "도둑놈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상인 출신의 관중은 당시에도 정말 극히 소수였던 중상주의자였다. 관중은 제나라를 부흥시키는데 상인의 기술을 이용하였다. 사마천은 그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를 "그가 정치를 할 때는, 화로 인한 것을 잘 다스려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돌이켜 복으로 만들고, 일의 경중을 귀하게 여기고, 신중히 일을 하여 균형을 맞추었다其为政也,善因祸而福,转败而为功。贵轻重,慎权衡"라고 평하였는데, 이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관중은 자원의 분배를 잘했고, 효율을 높혔으며, 타협과 신중한 결정 등을 통해 각종 질서를 다시 세웠다." 정말로 "기업가정신"의 표본이 아닌가.
관중의 개혁 중 후세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엄청난 오해를 일으킨 정책이 하나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백성을 4개로 나누는" 사농공상(士农工商) 정책 이다.
이 정책의 요지는 백성을 군인과 선비, 농민, 공인, 상인, 이렇게 4개의 계층으로 나누어 고정된 지역에 자신들의 임무에 따라 모여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국어-제나라어>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관중은 선비들이 지내는 사향士乡을 15개, 공인工人들과 상인들이 지내는 공상지향工商之乡을 6개로 구획하고, 각 향마다 2000개의 호户를 두었다. 이런 구획의 결과로 제나라는 3만명에 달하는 전문 군인과,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만2천명의 전문인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1개의 호를 1명으로 본다.) 이외에도, 도시 이외의 농민들은 45만 호나 되었다.
관중은 백성들을 4개로 나눈다면 4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相语以事,相示以巧"로, 같은 업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살면, 서로 경험을 공유하기 쉽고, 그 전문성을 높히기 쉬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두번째는 "相语以利,相时以时,相陈以知贾 "인데, 이는 같이 거주함으로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촉진에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번째는 전문적인 분위기의 조성이었다. 백성들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본업에 충실할 수 있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일을 방지해 직업의 안정성을 꿰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네번째는 기술의 전승이었다. 아이들은 어릴때부터 부모들이 하는 일들을 쉽게 보게되고, 아버지와 형의 지도 아래 자연스레 전문 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