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盐铁专营”的始作俑者"
"염철전매제(盐铁专营-소금과 철에 대한 독점 운영제도)"의 최초 창시자
관중의 거시 경제적 관점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는 염철전매제가 있다. 이 제도는 2천여 년 동안 이어져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중국식 중앙집권 경제제도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환공과 관중은 어떻게 하면 국가가 부유해질까 여러 차례 토론하였다. 제환공은 인구, 주택, 수목, 가축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길 건의하였다(미시적 관점). 하지만 관중은 제환공이 제안한 것에 모두 반대하였다. 그는 세금이란 형태가 있는 것이라 믿었는데 백성들이 실제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직접 세금을 메긴다면 자연적으로 백성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고 이상적인 방법은 형태가 없는 것에서 세금을 메겨 백성들의 불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관중은 "가격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이는 세금을 상품 속에 숨기는 것인데 간접적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물건을 구매한 사람은 자신이 내는 세금을 보거나 만질 수가 없었고 이들이 모르는 사이에 국가는 세금을 징수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간접세라는 방법은 세금을 낸다는 반감 또한 일으키지 않았다.
관중은 염철전매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唯管山海为可耳"라는 딱 7개의 글자를 제기하였는데 그 의미는 "산과 바다의 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하도록 하기만 하면 끝"이다. 산에서는 철광이 나고 바다에서는 소금이 나오니 산과 바다에 대한 독점은 자연스레 염철전매제도로 이어졌다.
농경 시기 소금과 철은 백성들과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때문에 이 두 항목은 국가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양대 기둥 산업들이었다. 관중은 한 예를 들어 염철전매제도를 설명하였는데 "만 대의 전차를 보유한 대국의 인구는 약 천만 명이다. 만약 성인에게 인두세를 걷는다면, 납세자는 약 백만 명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매월 30전을 낸다 가정할 경우 걷어들이는 세금은 3천만 전이된다. 하지만 소금의 가격을 올려 세금을 징수한다면 매월 6천만 전을 얻을 수 있고 이는 인두세를 걷는 것보다 2배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 또한 표면적으로 볼 때의 정부는 세금을 걷은 적이 없으니 민중들의 자잘한 불만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교묘한 세금 징수의 메커니즘은 단순히 국내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관중은 소금 수출에 대해서도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아무리 끓여도 없어지지 않는 바닷물을 끓여 얻어지는 소금으로 천하의 모든 이들은 제나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며 제나라는 큰 돈을 얻게 된다.
철에 대한 국가의 독점 또한 이와 같다. 일반적인 한 농가가 농사일을 짓느냐 마냐의 상관없이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바늘. 칼, 쟁기, 끌, 톱 등은 모두 철로 만든 것이다. 바늘 하나에 1전의 가격을 더할 경우, 30개의 바늘은 30전의 수익을 낸다. 이는 한 사람이 내야 하는 인두세와 같은데 유추해보면 철 전매로 인해 얻어지는 수익의 총량은 인두세를 걷는 것보다 결코 낮지 않다.
하지만 관중은 염철전매제를 주장하면서도 정부가 국영 소금 시장이나 국영 철광을 세워 운영하는 직접적인 시장개입을 추구하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이 관중을 공부하며 "독점적인 운영"을 "국가의 운영"으로 오해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것을 사실과 다르다.
염업을 예를 들어 이야기하면, 관중이 실행한 것은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정책이었을 뿐, 소금이 나는 호수 등은 민간에서 자유롭게 운영하여 소금을 생산하도록 개방하였고 여기서 생산된 소금을 국가가 일원화하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염업의 판매와 생산량을 통제하니 자연스레 가격까지 통제할 수 있었는데 제나라의 소금이 다른 국가들에 수출할 때 그 판매 가격은 원가의 40배까지 올릴 수도 있으니 국가와 상인들은 모두 엄청난 소득을 올렸다.
야철업에서 관중은 "소유는 국가가, 운영은 민간이国有民营"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먼저 모든 광산자원에 대한 국가의 독점을 엄중히 강조하였다. 그는 이를 정식으로 법제화하였는데 광물을 발견하는 즉시 국가가 그것을 보호하여 봉인하였다. 만약 독점적으로 채굴을 하는 자가 있으면 왼발과 오른발을 도끼로 찍어 자르는 형벌을 내렸다. 국가는 철의 가격에 대한 결정권을 가졌고 생산이 되는 모든 철기를 국가가 일괄 관리하여 판매하였다. 이러한 법적인 토대위에 국가는 철기를 제조하는 공장을 열었고 민간 상인들은 이를 자유롭게 경영하였다. 이익이 생기면 상인들은 7할을 가지고 정부는 3할을 가졌는데 이는 정부가 30%의 소득세를 징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가 자원의 모든 소유권을 가지고 경영권은 민간에게 나눠주며 일정 비율로 이윤을 분배하는 정책은 후세에 "자산은 국가의 것, 경영은 민간의 것"이라는 정책의 초기 형태가 된다. 염철전매제는 이후 국가둘의 근본을 바꿔버릴 정도의 큰 영향을 주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이때부터 우리가 '중국특색'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서방의 경제이론에 비추어 볼 때 한 국가의 주요 수입은(혹은 유일한 수입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수입은) 바로 세금이다. 여기에 있어서는 사회주의경제학자나 자본주의적 자유경제학파나 이견이 없다. 카를 마르크스 또한 "세금은 정부기구의 경제적 기초이다. 다른 것은 어떠한 것도 없다.", "국가 경제는 세금을 통해 체현된다." 라 믿었다. 현대 제도경제학자들의 어떤 이론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더글라스 노스 Douglass C.North는 정부는 "보호와 공정함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세금을 걷는 조직이다. 우리는 정부를 고용하였으며,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라고도 하였다.
서방의 법치주의는 여태껏 국민은 납세자라는 역할을 강조해왔다. 14세기부터 시작하여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은 세금 징수도 할 수 없다"라는 명제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견고하게 확립되어왔다. 사람들은 위 명제를 위반하는 것은 폭정으로 보았고 지키는 것은 법률을 따르는 것으로 보았다. 특이한 점은, 미국 상점의 경우, 상품의 가격과 소비세를 각각 나누어 납부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세금이 가격에 다 포함되있다. 쳔옌커는 과거 중국의 통치 속에는 "기만술"이 들어있다고 하였는데 관중의 "무형에서 걷고, 백성들이 불만을 품지 않게 하라"라는 말이 '기만술'보다는 더 좋은 늬앙스를 품긴다.
"관중의 변법"이후, 중국 정부의 수입은 단순한 세금의 수입과 독점 운영을 통한 수입이라는 2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독점운영은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통제한 뒤 이를 전매의 방식으로 실현하였다. 정부는 사실상 영리의 목적을 띤 경제 조직으로 변했다. 제나라는 통치를 점점 공고히 하였고 국가의 생계와 연결된 주요 산업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국유기업은 주요 산업들에 대한 통제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섰다.
이러한 경제 환경 중에, 국유기업은 마치 "정부의 기업"같았고 정부는 마치 "기업의 정부"같았다. 그것들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일단 형성되자 민영기업들은 그 안에 어중간하게 끼이게 되고 어찌할바를 모르며 정치게임의 희생양 되고 만다. 이러한 중국식 경제제도는 1000년동안 이어져 왔고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관중이야말로 정말 "나쁜 제도를 처음 창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