改革开放(上):没有蓝图的改革 - 개혁개방(상) : 청사진이 없었던 개혁
목차
머릿말
등소평은 "중국 개혁개방의 총 설계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러한 호칭는 개혁개방 운동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여기서의 '오해'란, 1978년부터 일어난 개혁개방이 엄청난 연구와 고민, 설계를 통해 나온 "계획적인 실험"이었다는 부분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실 개혁개방은 '일단 실행된' 실험이었으며 그 과정 속에서도 계속해서 수정을 거쳤던 말그대로 "청사진 따윈 없던 개혁"이었다.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사실은 개혁개방 초기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이 여전히 1차 5개년 계획의 재현에 대한 기대를 한껏 머금은 체 '156공정'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1978년 등소평은 곡목谷牧을 서방의 여러 나라들로 파견한다. 곡목은 여러 기업들의 투자유치를 위해 강철과 석유화학, 자동차 등 120가지 항목을 각 나라들을 돌며 제시한다. 일본과 싱가폴은 등소평이 '친히' 비행기를 타고 방문하여 유세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아무런 결과물이 없었다. 유럽과 일본이 사심없이 투자를 하는 국가들이 아니었고 더욱이 중국의 열약한 기초 공업 시설과 미약한 소비 능력은 중국에 대한 투자를 망설이게 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중국 정부는 어쩔수 없이 개혁 개방에 많은 힘을 쏟기 시작한다. 이때 중국 지도층이 직면했던 어려움, 즉 기체제(已体制)의 저효율, 자금과 인재의 부재, 마음속 깊이 있는 의식(사회주의)과 하고자 하는(개혁개방)일의 사상적 충돌 등은 과거 이홍장이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이 두 시대의 지도자들에게 특히나 무서웠던 점은 적절한 경제 이론이 없는 관계로 경제 개혁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의 것을 참고하여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