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
상앙(商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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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395년 |
사망 |
기원전 338년 |
별칭 | 위앙(韋鞅). 공손앙(公孙鞅), 상군(商君) |
생애
상앙(商鞅,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38년)은 위(韋) 출신으로 위앙(韋鞅). 공손앙(公孙鞅) 또는 상군(商君)이라고도 불린다. 전국시대의 정치가, 혁명가, 사상가로서 법가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390년경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정치 행정학인 형명학을 평생의 동지인 시교라는 사람에게서 배웠다. 또한, 법가 정치 개혁가인 이희와 오기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기원전 361년에 즉위한 진효공은 진(秦)을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그가 첫 번째로 한 것은 인재를 모으는 일이었다. 진나라에서 인재를 모은다는 소식을 듣고 20대 중반인 상앙은 진나라로 망명하여 부국강병의 술책을 통해 효공을 설득했다.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공을 세운 사람에겐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사람에겐 벌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정의 위신이 서고 모든 개혁이 뜻대로 시행될 수 있습니다.” 이는 효공의 뜻에 부합되었고 효공 설득에 성공하였다. 이후, 상앙은 좌서장을 거쳐 총리 격인 대량조로 승진하여 정치 개혁의 총 설계자가 되었다. 두 차례의 변법을 성공시켜 약소국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때 시행한 그의 정책을 '상앙변법'이라 일컫는다. 군사적으로도 전수전략과 병법에 능통하였던 상앙은 연전연승하여 후일 진나라를 천하통일 반열에 올려놓아다. 그러나 엄격한 법집행이 태자와 보수 집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진효공이 죽자, 역모의 모함으로 사지가 찢기고 가족 효공은 지이 참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변법 추진의 기반
상앙이 강력한 법을 집행하는 데는 백성의 법에 대한 신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상앙은 도성의 남문에 3장 길이의 나무기둥을 놓고 기둥을 북문으로 나르는 사람에게 10금의 상을 준다고 했다. 아무도 상앙의 말을 의심하며 시행하지 않자 50금으로 올렸다. 어떤 사나이가 속는 셈 치고 기둥을 옮겼더니 그 자리에서 50금을 주었다. 이 사건 후 상앙의 정책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은 시험대에 올랐다. 태자 사(駟)가 사형선고를 받은 왕족을 숨겨주었다. 법에 따르면 범법자를 숨겨주면 죄를 받았다. 상앙은 법이 강력히 집행되기 위해서는 신분과 무관하게 법 앞에서는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자를 직접 벌할 수는 없으니 태자를 보좌하는 장공자 건(虔)과 사부 공손고에게 처벌을 가했다. 이로 인해 마침내 강력한 법 집행이 완전히 자리잡을 수 있게 됐다.
정책
지방제도 : 작은 규모의 향촌을 합하여 큰 현으로 모으고 , 현에는 령(令)을 두어 대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전국을 41현으로 편제함.
연좌법 : 호적을 정비하여 5家를 1保로하고 10家를 연좌함. 한 집이 죄를 지으면 나머지 아홉 집이 고발하도록 하였고, 고발하지 않으면 나머지 아홉 집이 벌을 받음.
부세 : 한 집에 두명 이상의 남자가 있으면 필히 분가하며, 이를 어길 시에는 부세를 배로항.
안좋은 풍속의 개선 : 진은 융적의 풍속에 물들어 잇어 부자형제가 한 방에 같이 거주하며 남녀관계가 혼란스러웠으나 엄한 명령을 내려 이를 금지함.
상벌 : 군공이 있는 자는 법률에 따라 작위와 상을 부여하였으며 다툼을 벌이는 자애게는 경중에 따라 형벌을 받게함.
지력의 최대한 활용 : 천맥(阡陌)을 개발하여 경지를 넓힘.
도량형(度量衡) : 升,斗,저울 추, 저울 대,丈,尺을 통일.
군공(軍功)장려 : 작위를 20등급으로 나누어 적의 머리를 하나 베어오는 자에게는 작위 한등급을 올려줌.
이처럼 상앙은 한편으로는 생산력을 강화시키고 전사들의 전투력을 상승시켰으며 신흥지주의 지주제도가 발전을 촉진시켰지만, 귀족영주의 권력을 제약하고 그들이 법을 어기고 함부로 착취하는 것을 금하였다. 즉, 그의 법은 '부녀자나 아이들마저도 상군(商君)의 법'이라고 할만큼 백성들에게 깊게 새겨졌다.
평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사이, 즉 새로운 질서로의 개편 과정에서 학자들은 인(仁), 예(禮) 등 각자의 논리에 따라 나라를 이끌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질서와 혼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상앙은 법 적용의 평등성과 상벌의 체계화를 시행함으로써 혼란을 바로 잡았다. 즉, 기존 규범의 구속력의 범위를 달리 한 것이다. 통치의 관점에서 군주의 존재 가치는 신민의 존재로부터 생겨난다. 법을 적용하기 위해 신민에게 법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했다. 따라서 법을 통해 객관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기반으로 의무를 부여하고 일정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신민의 복종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법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데 효율적이다. 전국시대에 넘어오면서 영토라는 개념이 정착되면서 중앙에서 관리해야 할 영역이 넓어졌다. 법은 넓어진 영토를 일관성 있고 빠르게 통치할 수 있는 수단이다. 법은 전국에 동시에 적용될뿐더러 신속히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법은 인간 중심적이어서 백성들이 받아들이기 쉬웠다. 종교의 권위가 사라져 천자의 지위가 쇠퇴한 전국시대에 인간 평등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현대사회와 달리 모든 국민이 논의하여 법을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종교적 논리로 설명하지 않고 불문법을 포함한 인간 스스로 만든 법의 논리로 정치했다.
참고문헌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통사』, 조병한 역, 서울: 서커스, 2016.
조관희, 『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중국사』, 파주: 청아출판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