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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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8월 13일 (월) 21: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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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결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의 공식적 평가와 함께 작성 과정에서 화궈펑의 퇴진이 결정되었다. 이 문건에는 4천여 명의 당 간부와 이론가들이 동원됐으며 만장일치로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 문건의 완성을 위해 15개월의 기간이 소요됐다고 알려졌으며 덩샤오핑도 이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의에서는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모순을 국가의 주요모순으로 보았다. 농업합작화나 1956년 사회주의 개조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의 경우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으며, 단지 지나치게 확대된 점이 문제였다고 평가했다. 대약진운동에 관해서는 자연재해와 소련의 기술관료들이 철수한 것에 그 책임을 돌렸고,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이 그것을 일으킨 것이 과오라고 인정했지만 주요한 문제점들은 린뱌오와 4인방의 책임으로 돌렸다. 덩샤오핑은 마오의 실수나 잘못은 비판하되 혁명적 합법성과 국가 정통성을 위해서 마오의 공헌을 어느 정도 인정해줘야 된다고 강조했다. 결의는 마오의 업적을 높이 샀지만 그의 마지막 통치 20년의 잘못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여기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큰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10년에 걸친 재난으로 평가되었다."

이 결의에 앞서 1980년 10월, 당의 고급간부 4천명이 참가한 1개월에 걸친 대토론회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중국 최고의 이론가이자 마오쩌둥의 비서를 역임했던 후챠오무가 이 결의가 작성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울면서 호소할 정도로 신랄하고 직접적인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제기된 많은 직접적인 비판들은 정식으로 통과된 결의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참고자료

(서평)「개혁개방이 아닌 덩샤오핑 체제」(『덩샤오핑 시대의 탄생』, 안치영, 창비), 김도경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모리스 마이스너
"3차 사상투쟁의 전조? : 「건국 이후 역사문제 결의」 발표 30주년 좌담회 감상", 안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