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国经验与日本战后思想建设
孙歌:中国经验与日本战后思想建设
쑨꺼 : 중국의 경험과 일본 전후 사상의 건설
오늘 나는 일본의 전후 1945년부터 1960년대 초기까지의 사회변화 속 지식계가 관심을 가지던 근본 문제를 가져와 우리 스스로에 대한 과제 인식을 돌이켜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민주주체성의 상실과 저항--2차대전 이후의 일본 사회의 변화
1945년 일본은 일본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잊을 수 없는 비참한 패배를 겪으며 미국에 의해 점령된다. 이 단계에서 발생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천황이 '상징적인' 존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실권을 잃어버렸지만 존재하는 천황제도가 완전히 쓸모 없어 진 것은 아니었는데, "상징물"로서 천황이 존재하고 남아있게 함으로써 일본의 기층 민중들이 자신들의 사회가 완전히 부서진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도록 하였다. 이를 두고 국제정치의 관점에서 왕왕 제기되는 해석은 천황제가 사라진 일본이 적화가 되어 사회주의 국가로 변해버릴 가능성을 걱정한 미국이 천황제를 남겨두고 일본이 사회주의 국가로 변하지 못하도록 미국이라는 전차위에 일본을 안전하게 묶어두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천황이 남아 있었기에 민중들이 전쟁전과 전시의 상황가 다를 바 없는 사회 재편을 신속히 이룰 수 있었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패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미군정에 의한 통치되던 일본 정부도 동시에 사실을 교묘히 조작하였다.
미국의 점령이 가져온 변화 중 하나는 언론 및 출판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선거의 자유로 상징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신속한 도입이다. 이러한 권리들은 당시의 일본 국민들에게 있어 이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성한 충격을 주었다. 일본의 좌익들은 자유주의자들이건 마르크스 주의자들이건 모두 이 시기를 해방의 시기로 생각했고 미국의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했다. 맥아더가 미국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1950년 이전 당시의 미국은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고 생산에 비교적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일본 공산당 지도부는 미국식 민주주의는 실질적인 민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들도 미국처럼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47년, 일본 현대사에서의 유일무이한 총파업 사건이 일어난다.
1947년 1월 1일, 일본의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신년 축사 때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사회발전을 불안하게 하고, 생산력 발전을 방해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현 상황에서 저는 국민 여러분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서 반동을 일으키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멈출 수 있길 바랍니다." 요시다 시게루의 축사를 있고난 뒤, 이 축사를 겨냥하여 1월 9일, 일본 전국민 총노동자회는 "모든 관리, 정부 부처의 노동자 조합과 공동 투쟁 확대 위원회"를 발족하고 총파업을 준비한다. 이어 전국노총은 국가 철도국의 이이 야시로伊井弥四郎를 "모든 관리, 정부 부처의 노동자 공동 투쟁 위원회"의 임시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그의 지도 하에 노총은 전국적으로 노동자 조직의 파업을 계속해서 선전하고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의 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교섭을 정부와 시도한다. 하지만 몇 번에 이은 교섭 시도에도 불구하고 요시다 시게루는 이들을 상대 하지 않는다.
이때 맥아더 휘하의 군관들이 등장해 교섭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파업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다.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경선 중이던 맥아더는 미국 노동자들의 원성을 살까 두려워 파업에 반대하는 어떠한 (자신의 서명이 담긴) 공식 문서도 남기지 않았고 모든 것은 말로 전달하였다. 파업의 핵심 지도부들은 마침 맥아더의 어떠한 파업 반대 서면 문건도 없는 바, 이를 빌미로 그가 파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파업 계획을 계속적으로 밀고나간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니 정부가 노총 측에서 제기한 각 요구들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2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킬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맥아더는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고 파업 위원회 핵심 지도부들에게 파업의 중지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리고 1월 31일 오후 9시, 노동조합의 지도자 이이 야시로는 NHK로 끌려와 전국 노동자들에게 파업의 중지를 요청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야시로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맥아더 연합국 군 최고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방송을 통해 전국에 있는 관리(국가기구에서 종사하는 사람) 공이公吏(공공기구에 종하하는 사람), 교원들에게 전달합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파업을 중단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 일은 참담함을 느끼게 합니다만 여러분들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전쟁 이후 우리 일본은 UN으로부터
많은 물자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노동자 중 한 명으로서 저는 매우 감사합니다. 지금 이 담화를 말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은 정말로 유감입니다만 우리는 파업을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
여러분들이 보게에 이 상횡이 참 웃기지 않은가? 노동 운동의 지도자가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하지만 어쨌든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1947년 2월, 일본 민중 저항 정부를 대표하는 민중 조직은 '요시다 시게루에게는 반대할 수 있지만 UN군 신분으로 들어와 있는 미국에게는 반대할 수 없구나.' 라는 사실을 통감할 수 있었다. 이 감정은 일본 노동 운동 뿐만 아니라 일본 공산당에게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현실과 미국의 정책에 무조건 적인 신뢰를 보내고 고마워하던 그들에게 미국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총파업이 실패한 이후, 일본은 1948년 7월 21일 정부명령 201호 법령을 공표한다. 이 법은 지금까지도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는 법으로 공무원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 어떠한 사회 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있다. 처음에는 항의 시위를 하던 공무원들도 이 법이 실행되는 순간부터 거리에 나오면 합법적으로 체포 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48년 이후, 미군정이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다는 점과 일본 정부와 한패라는 미군정의 본모습이 드러나면서 일본 민중들(특히 우익사회)는 자신들의 인식 및 사상에 대한 조정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