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이념 추구, 정치 투쟁 등으로 일어난 중국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운동이다. 중국 안에서는‘무산 계급 문화대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중국현대사를 문혁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중국현대사의 중요한 주제이다. 현재까지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논의는 진행 중이며, 문화대혁명에 대한 해석과 접근 방법도 다양하다. 문화대혁명은 그 배경과 과정이 복잡한 만큼 어느 한 가지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문화대혁명은 그 시기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시기 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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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말 | 문예계 및 학술계에 제한된 정풍운동 |
1966년 초중반 | 당 공작조 중심의 보수파 홍위병 및 '혈통론' 중심의 운동 |
1966년 중후반~1968년 | 조반파 홍위병 중심의 '탈권 투쟁' |
1968년~1971년 | 당과 군조직의 연합이 자신들에 대한 도전을 재차 제압하고 대중 억압적 국면에서 당 관료기구의 권력을 회복하고 당내 권력 갈등이 심화 |
1971년~1976년 | 린뱌오 실각 후 4인방 중심으로 새로운 캠페인성 문화대혁명이 지속, 마오쩌둥 사망 및 4인방 체포로 종결 선언 |
문화대혁명 배경
정치적 요인
문화대혁명을 정치적 배경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주목해야 한다. 1962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확대 공작회의(7000인의 대회)에서 마오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인정하며 자아비판을 하였다. 이 대회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8자 방침’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정치·사상 문제를 뒤로한 경제 조정 정책이다.‘8자 방침’은 마오가 주도하여 실패한 대약진운동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시장의 원리를 이용한 경제 자유화 정책이다. 마오는 이후 중국공산당 제8기 10중전회에서 계급 투쟁을 강조하며 정치·사상의 중요성을 제창하는데, 마오와 류사오치·덩샤오핑 간에는 경제·사회건설에 대한 노선의 대립이 발생한다.
사회적 요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조정 정책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한 경제 파괴를 어느 정도 회복시켰으나, 말 그대로 경제 분야에서의 수정일 뿐이다. 게다가 그들의 자유화 정책은 낙후한 경제 수준에서 수많은 경제적 약자를 발생시켰고, 효율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들을 더욱 도태시켰다. 또한 조정 정책은 관료주의를 강화시키며 대중과 관리 사이의 모순을 발생시켰다. 이 외에도 도시와 농촌 사이, 농민과 노동자 사이의 모순이 발생했다. 경제 자유화에 따른 각종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결국에는 자신 입장을 제각기 주장하는 대혼란의 사태를 몰고 온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국제관계
1960년 대 소련은 중국에 체류 중인 자국의 기술자들을 철수시키고 중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중·소 국경에서는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62년 10월에는 중국은 인도와의 국경 분쟁이 일어났으며, 미국, 소련, 영국이 합의하는 핵실험 중지조약이 체결되자 핵실험을 진행 중이던 중국은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1961년에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결정하였고, 1964년 8월에 이르러 ‘통킹만 사건’을 게기로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폭격이 지속되었다. 중국은 미국이 한반도, 타이완 해협, 인도차이나 반도를 둘러싸고 중국에 대한 ‘삼로 우회 작전’을 펼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미국의 위협으로 중국은 흐루시초프을 타도한 브레크네프 체제의 소련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지만 소련은 마오의 하야를 요구하는 등 중·소의 관계 개선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핵을 공중에서 투하하는 방법까지 성공한 중국은 <인민 전쟁의 승리 만세>라는 린바오의 논문으로 소련과의 결별을 확실히 나타냈다. 미국과 소련과의 지속적인 갈등과 이로 인한 전쟁 위협 등은 마오로 하여금 인민 전쟁 태세의 필요성과 다시 중국만의 방법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된 마오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경제 중시 노선이 자본주의의 길과 관련됐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미국에 굴복한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라고 비판한다.
문화대혁명 전개과정
<評新編歷史劇 '海瑞罢官'>
‘해서파관’은 당시 유명한 공산당원이자 베이징시 부시장이었던 우한(吳晗)이 만든 명대의 청백한 해서를 기리는 신편 역사극이다. 이 경극 극본은 1959년 4월에 개최한 중공중앙 공작회의에서 해서를 학습하라는 마오의 제의에 부응하여 나온 것으로 처음에는 마오의 칭찬을 받았다. 1959년 8월에 루산회의에서 마오는 좌파 해서와 우파 해서를 구분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1959년 9월에 우한은 먼저 <<런민일보>>에 <해서를 논함>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우한은 그의 주장이 좌파 해서 정신이고 그것이 루산회의 이후 국방부장 자리에서 해임된 펑더화이의 우파 해서 정신과 반대되는 것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후 1961년 ‘해서파관’이라는 이름으로 해서에 관한 연극이 1월에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1962년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류사오치(劉少奇)의 조정 정책 실행은 당내에 노선의 대립을 야기하였다. 류사오치는 문제가 된 펑더화이(彭德懷)의 대약진운동 비판 편지가 일부 사실이라고 이야기했다. 당에 대한 마오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가운데 마오의 부인이자 전국영화지도위원회 위원 장칭(江靑)이 ‘해서파관’의 문제점을 마오에게 건의했고, 1964년 캉성(康生) 또한 ‘해서파관’이 루산회의와 펑더화이 문제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오는 처음에 이를 무시했지만 결국 동의한 것으로 보이며, 장칭의 사주아래 야오원위안(姚文元)이 ‘해서파관’을 비판하는 글을 1965년 11월 10일 지방신문 <<원후이보>>에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이 글은 1965년 3월부터 발표되기 까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글이 완성된 후 마오의 검토를 받았다. 이로 봤을 때,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잃어버렸던 지배력을 되찾기 위하여 이 글이 정치적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신편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하다>라는 글은 "토지를 되돌려준다" 등의 대사를 문제삼아‘해서파관’을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글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글은 처음에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중공중앙 서기처가 마오의 승인 아래 써진 글임을 알아낸 뒤, 18일 뒤에 주요 신문지상에 전재되었다. 중공중앙 부주석인 저우언라이와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베이징 시위원회 제1서기인 펑전은 '해서파관'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기 보다는 학술토론으로 진행하려고 했으며, 베이징 각 신문에서는 야오원위안의 글을 반박하는 내용의 글도 게재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야오원위안의 논문 발표 이후 문학계 내에서 논쟁 외에 6개월 동안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였다.
문화혁명 5인소조
문학과 정치의 밀접한 관계를 알던 마오는 1962년 문학을 통해 교묘히 여론을 조작하는 반당 활동에 경계해야 함을 주장했다. 1965년 1월 정치국 사무위원회 회의에서 마오는 '문화혁명'의 필요성을 얘기했고, 마오의 요구에 따라 1964년 7월에 구성됐던 '문화혁명 5인소조'는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야오원위안의 논문 이후, 1966년 2월 3일에 펑전에 의해 첫 회의가 열렸다. '문화혁명 5인소조'는 펑전, 루딩이, 캉성, 저우양, 우렁시이며, 이 중 마오주의자는 캉성 밖에 없었다. 그들은 회의를 통해 <작금의 학술토론에 관한 보고요강(關於當前學術討論等彙報提綱)>(2월요강)을 입안하며, '해서파관' 문제를 순수한 학술문제로 그 범위를 한정시켰다. <2월요강>은 중앙정치국 상위 위원들의 심사와 토론을 거친 뒤 마오에게 전달됐고, 마오는 이에 대한 반대 의사를 보이지 않았으며 2월 12일 중공중앙 문건으로 전 당에 하달되었다. 한편, 이때 장칭은 린뱌오와 함께 '부대 문예공작 좌담회'를 소집한 뒤 <요록>을 만들었다. <요록>에서는 마오와 반대되는 반사회주의 검은 노선이 정치를 독점했므여, "문화전선에서 한바탕의 사회주의대혁명을 결연하게 추진하고 검은 노선을 철저하게 물리쳐야 한다"고 호소했다.[1]
중앙문화대혁명소조
해서파관을 계기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점차 정치혁명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를 이용하여 린뱌오는 중앙군사위 비서장이자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뤄루이칭을 숙청시켰고, 군대는 린뱌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양상쿤, 펑전, 루딩이 등이 비판을 받았다. 장칭과 캉성의 조직적인 정치 계획은 이후 당내에서 계속되었고 많은 작가, 학자, 간행물들도 비판받으며 점차 전국전인 혼란이 도래하기 시작되었다.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에 걸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고, 5월 16일에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통지>(<5·16통지>)가 채택되었다. 이는 <2월요강>을 비판, 철폐하고 문화영역에 있는 모든 부르주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문화영역에서의 영도권을 되찾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 당, 정부, 군대 등에 존재하는 모든 부르주아 인물들을 숙청하거나 직무를 이동시켜야 된다며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의 개시를 알렸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를 위해 새로운 '중앙문화대혁명소조'가 설치되었다. 천보다, 캉성, 장칭, 장춘차오 등 마오주의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권력 기반은 점점 무너져 내렸다. <5·16통지>가 공식 당 문서로 채택되어 사회로 퍼지고 중앙문화대혁명소조라는 조직이 만들어지자 문화대혁명은 대규모 정치·사회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마오의 목적은 정치 권력 탈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모든 방면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혁명정신과 사회주의 의식을 강조하며, 그러한 정신이 지속돼야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마오의 주의주의(主意主義)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며, 이러한 마오의 생각은 대중의 동원이 필연적이었다.
홍위병의 출현과 류사오치·덩샤오핑의 실각
홍위병의 출현과 <16조> 문혁 강령
마오는 대중의 동원을 위하여 기존의 권위에 반기를 들라하며 대중을 장려했고 이에 따라 수많은 사회집단이 생성되었다. 마오와 문화대혁명이 제시한 혁명의식에 고무된 사람들을 비롯하여 각자의 목적에 따라 여러 단체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5·16통지> 이후 문화대혁명의 구체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된 것이 없었다. 문화대혁명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베이징의 대자보 사건 이후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1966년 5월 25일 중앙문화대혁명소조의 지시를 받은 베이징 대학 철학강사 녜위안쯔 등 7명은 대학총장과 지도부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이 대자보는 처음에 학교 당 조직에 의해 뜯겼지만 마오는 6월 1일 녜위안쯔의 대자보를 "20세기 1960년대 중국의 파리 코뮌 선언서다. 그 의의는 파리 코뮌을 능가하고 있다"[2]라고 평가하며 급진적 학생 움직임을 장려했다. 이러한 마오의 평가는 5월 29일 칭화대학 부속중학 학생 40여 명으로 맨 처음 구성된 홍위병 조직 이후로 무수히 많은 학생 조직을 만들어 냈다. 학생 조직들은 학교 당 조직 공격을 비롯하여 자신들끼리 싸우는 등 과격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류사오치가 주재한 회의의 결정에 따라 당에서는 공작조를 파견하였다. 공작조는 대자보를 길거리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대규모 규탄대회를 막았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급진적인 학생 조직과 공작조의 충돌도 발생했다. 또한 공작조는 당 관료의 자녀들로 구성된 학생 조직을 구성하여 공격 목표를 부르주아 정신을 가진 사람과 계급출신이 안 좋은 사람들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였다. 부르주아 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교수·작가를 비롯한 지식인이었으며 계급출신이 안 좋은 사람들은 혈통론에 입각한 과거 자본가·지주 등 부르주아의 자녀들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지식인들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바로 당 관료들이 구성한 보수적인 학생 조직이였다. 하지만 공작조가 문화대혁명 운동을 당내 실권파 타도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이끌자 이에 대한 반발심도 점점 커져갔다. 공작조 지지세력과 반대 세력 간의 대립을 격렬해졌다. 공작조의 반대 세력의 구성원들은 혈통론으로 비판을 받는 학생들을 비롯하여 현재의 체제 내에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언쟁과 싸움은 1966년 여름 까지 지속되었다.
마오는 그간 모습을 잘 보이지 않다가 7월 26일 돌연 우한(武漢)에서 장강을 헤엄쳐 건너며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공작조를 비판하고 그들을 철수시켰다. 공작조가 철수되자 그간 보수파와 공작조의 협공으로 열세를 보였던 조반파 무리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홍위병이라는 이름의 학생 조직이 자유롭게 만들어졌다. 8월 1일부터 12일까지 제8기 11중전회가 개최되었다. 5일에 마오는 <사령부를 포격하라(炮打司令部)>는 대자보를 발표했고, 8일에 회의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16조>)이라는 문혁 강령이 채택되었다. 이 회의에서 비마오주의적 당 지도자들의 자리는 홍위병의 대표들로 채워졌으며 마오는 일부 지도자들이 부르주아계급의 입장에 서 있다고 비판했다. <16조>의 두 가지 큰 목표는 부르주아계급에 서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내 실권파 타도와 사구(四舊) 타파였다. 사구 타파란 부르주아지가 착취계급의 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관습을 이용하여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파괴해야 된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당까지 혁명으로 바꿔야 될 것으로 설정되는 정치 운동으로 더욱 확대된 것이다. <16조>는 나아가 문화대혁명이 이룩할 미래의 정치권력이 마르크스가 묘사한 파리 코믠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라고 홍보했다.
<16조>의 문혁 강령과 더불어 8월 18일 천안문 앞 광장에서 신격화된 마오에게 대중혁명의 선봉으로 임명되어 혁명 운동을 승인 받은 홍위병들은 거리로 나와 마오의 지시에 따랐다. <16조>는 그들에게 강제와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지만 홍위병들은 마오의 사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사구 타파를 옛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파괴로 이해하였다. 마오의 붉은 소책자를 항상 품고 다니며 그들은 박물관, 고서적, 예술품, 유교경전 등을 모두 파괴했다. 오늘날 부르주아를 상징한다고 생각한 서구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들도 파괴되었다. 이러한 무차별적인 파괴는 불교 기념품을 소지했거나 서구식 복장을 한 사람들까지 공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당내 실권파라고 명명된 사람들은 홍위병에 의해 체포되어 수모를 당했고 육체적인 학대도 당하였다. 홍위병들의 이러한 행보는 종종 노동자와 농민과의 충돌도 발생시켰으며, 각자의 입장이 제각기 달랐던 홍위병들은 홍위병 안에서도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눠져 끊임없이 다투었다. 가장 급진적인 홍위병들은 하방운동으로 농촌으로 보내져 도시에서 취업의 기회를 잃은 청년들이다. 그들은 하방에서 면제되는 등 특권을 갖는 당 간부의 자녀들에게 불만을 표시했는데, 간부의 자녀들처럼 기존의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만족한 사람들은 주로 보수적인 홍위병들이었다. 홍위병들은 점점 중앙의 통제 밖으로 벗어났고 그들은 '주자파(走資派)'의 구분 없이 당 전체를 공격하였다. 인민해방군의 지원을 받는 홍위병들은 전국을 누비며 무질서한 모습으로 문화예술 파괴, 당 조직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을 이어갔고, 그들의 무차별적인 공격과 파괴가 큰 사회혼란을 야기하자 당내 실권파의 제거를 거의 이룬 중앙 문혁소조는 그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류사오치 ·덩샤오핑의 실각
제8기 11중전회 이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 대한 마오주의자들의 공공연한 비판이 거세졌다. 류사오치는 중국의 흐루시초프 등으로 불렸으며 덩샤오핑은 당내 실권파의 2인자라고 불렷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결국 1966년 10월 23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공작회의에서 자아비판 문서를 제출해야 했고, 계속된 공격으로 류사오치는 1967년 1월 이후 집무 불가능 상태가 되어 사실상 연금 상태에 처해졌다. 이 시기에 류사오치주의로 판단되던 펑전, 천윈과 같은 고참 고급간부들도 홍위병들에 의해서 공개비판 되었다. 4월 1일 <<인민일보>>에는 류사오치를 "당내 최대의 실권파, 중국의 흐루시초프라는 논문이 게재되었고, 7.8월에는 류사오치·덩샤오핑을 비판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다. 1968년 10월 중국공산당 제8기 12중전회에서 류사오치는 영구 제명되었으며 덩샤오핑은 당에 남아 감찰을 받는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미 1966년 11월부터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류사오치는 1969년 베이징에서 허베이로 이송 중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상하이공사와 혁명위원회
상하이공사
홍위병들의 사회 운동은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드는데 실패하였다. 사회적 혼란만 더욱 가져왔고 마오는 이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시인했다. 천보다는 지방의 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 홍위병들과 농민, 노동자의 대립 구조를 만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홍위병의 운동이 혼란으로 빠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공산당의 모습은 사라졌다. 베이징 외 지역들은 마오의 문화대혁명 이념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마오의 말을 따르는 과격한 홍의병 및 대중운동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는데 급급했다. 베이징의 마오주의자들은 지방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세력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망가들이 권력을 탈취하라고 대중들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1967년에 상하이에서 그 모습이 실현되었다. 상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공업화된 도시로 가장 많은 프롤레타리아들이 사는 지역 중 하나이다. 상하이에서도 초기에는 흑명단(黑名單)의 파기와 같이 다른 지역과 비슷한 모습의 문화대혁명 운동이 보여졌다. 하지만 임시직, 계약직 노동자 등 자신의 생활조건과 노동조건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들과 생계가 불안한 농민들 및 제대 병사 등이 운동에 합세하자 운동의 규모는 커졌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정치조직을 세웠다. 1966년 11월 왕훙원(王洪文)이 이끄는 상하이노동자혁명조반총사령이 만들어졌으며 그들은 당의 정치권력 독점을 비판하였다. 베이징에서 장춘차오(張春橋)가 파견되어 노동자총사령부를 합법적인 혁명조직으로 인정하자, 그들의 운동은 더욱 다양해지고 격렬해 졌으며 기존의 체제에서 만족을 하던 노동자 집단인 노동자적위대와의 무력 충돌도 발생했다. 결국 1967년 1월 6일 백만이 넘는 시민이 집결한 대중집회에서 상하이 고위 관료들은 비판받고 직위에서 물러나게 되며 구 시당 위원회가 무너지고 1967년 2월 5일 상하이 공사가 설립되었다. 이는 마오의 최초 설계에 따라 파리코뮌식의 인민주권을 실행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혁명에 당의 지도가 없을 수 있는지, 군대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엽검영(葉劍英)이 책문을 제기했고 이에 마오는 동요하게 된다. '파리코뮌 원칙' 자체는 유토피아적 성격을 띄기 때문에 이를 실현시키려면 제도적 건설과 구체적 정책 조치가 필요한데, 당시 조반파 홍위병들은 일종의 이상과 이념에 기대 상하이공사 건설을 선포한 것이다. 진정으로 파리코뮌 원칙을 실행해 인민주권을 세우려면 반드시 일당전제의 관료화되고 극권화된 국가 정치체제를 타격해야 했기 때문에 마오는 당내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그는 일당전제체제를 돌파할 수 없었고 상하이공사는 설립된지 18일 만에 붕괴하고 만다.[3]
혁명위원회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조직의 지도자들은 상하이 노동자들이 아닌 중앙에서 파견한 장춘자오, 야오원위안이었다. <상하이 공사 선언서>에는 상하이 공사가 마오 사상의 지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건에서 생겨난 참신한 지방 국가기구라고 밝혔고, 마오도 상하이 1월 혁명을 대혁명이라고 지원했다.[4] 하지만 마오는 1주일 뒤에 상하이에서 나타난 모습을 칭찬하면서도 상하이 공사의 명칭에 반대하고 있었다. 2월 23일 결국 상하이 공사는 상하이혁명위원회로 개칭되었다. 이러한 결정에는 대중의 탈권에 대한 당의 고참간부 및 군 관계자들의 강한 반대 의견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국제관계 속에서 빠른 사회적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이때 혁명대중 대표, 혁명 지도 간부, 인민해방군으로 이루어진 삼결합의 혁명위원회를 유일한 정치권력 기구로 바라보았다. 대중대표의 정부 지도 기구 진입은 마치 문화대혁명의 '대중의 정치 참여'의 제도화 조치 같지만 실제로 정권의 핵심 역량은 원래의 당권파였다.
군대 개입
파리 코뮌의 원칙을 따른다고 제창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혁명위원회가 중국 각 지역에 생겨났다. 그러나 마오의 이념에 따라 일어선 급진적인 청년들과 시민들은 위로부터의 통제에 계속해서 반발했다. 마오는 군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군대를 불러서 조반파를 지지하게 하고 전국적 질서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군대는 국가 기구 중 가장 관료화된 조직인데 이를 통해 관료 엘리트에 반대하는 대중혁명운동을 지지하고 돕도록 한다는 것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나중에 군대가 각 지방 보수파의 방패막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군대는 조반파를 지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수파 쪽에 서게 되고, 전국 각지에서 조반파를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에도 군대와 조반파의 충돌은 계속되었고, 마지막에는 당시 무한을 시찰중이던 마오의 거처를 현지 군대와 보수파 조직이 포위한 7.20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전국적으로 조반파가 주체가 된 군대 반대가 최고조를 이루고 있었고, 이들은 군대 내의 당권파를 타도하고 총을 지닌 유소기와 등소평 노선을 타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결정적 순간에 마오는 방향을 돌려 군대를 지지했고, 조반파를 타격해나갔다. 조반파의 군대 반대는 마오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마오는 군대가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의 주춧돌'이며 절대로 혼란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반파를 희생시켜 군대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을 선택해 군대의 지지와 맞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이 때 조반파 역시 마오가 그렇게 임의로 지배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 하나의 세력이 되어 있었고, 끈질기게 저항해 복잡한 국면을 형성했다. 이러한 전국적 대란이라는 배경하에 수많은 사람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조정할 것을 고려해 새로운 선택을 하며, 조반파는 '문혁 신귀족', '소요파', '청년 모택동주의자', '17년파'의 4대 파벌로 분화되었다.[5]
문화대혁명 중심 세력의 몰락
린뱌오의 몰락
문화대혁명 기간 중 린뱌오는 마오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였다. 중국공산당 제9차 전국대회 이후 린뱌오와 사인방 세력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린뱌오는 중국공산당 제9차 전국대회에서 그 위치를 확실히하였지만 불과 1년 뒤부터 마오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마오는 1970년에 열린 공산당 제9기 2중전회에서 자신에 대한 천재론을 주장하는 천보다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또한 이를 동조한 사람들도 비난했는데 린뱌오는 천보다와 함께 마오를 찬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천보다 비판 정풍운동이 전개되고 자신에 대한 비판 움직임이 일자 린뱌오는 쿠데타를 실행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사전에 마오에게 적발되어 공군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도중에 몽골 상공에서 추락사하였다.
덩샤오핑의 부활과 재몰락
1972년 4월 <<인민일보>>에 <이전의 과오를 이후의 교훈으로 삼고, 병을 치료해서 사람을 구하자>라는 사설이 발표되는데 이는 저우언라이의 간부 복권운동이 진행됨을 보여준다. 8월 1일 건국기념일 날 실각했던 일부 간부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덩샤오핑도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합의 하에 복귀하였다. 덩샤오핑은 1973년 3월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했으며 12월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정치국원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방광암으로 건강이 악화된 저우언라이의 후계자로 떠올랐다. 그는 복귀하여 <3개의 세계론>을 연설하고 1975년 공업·농업·군·교육 등에서 전면적인 정돈을 추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의 후계자로 부상하자 저우언라이의 정적인 사인방이 주도한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으로 저우언라이와 함께 공격받았으며 결국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뒤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존경받던 저우언라이의 죽음과 덩샤오핑의 지도 아래 경제의 급속한 회복을 경험한 대중들은 사인방을 비판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는 4월 4일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사인방은 이 운동을 덩샤오핑이 계획한 음모라며 덩샤오핑의 모든 직무를 해임하고 당 내에서 감찰을 받게 하였다.
화궈펑의 등장과 사인방의 몰락
저우언라이의 사망은 그의 지위였던 국무원 총리와 당 부주석 지위를 놓고 또다시 권력 투쟁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사인방의 손쉽게 차지할 것 같았지만 마오의 뜻으로 화궈펑이 총리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4월 7일 그는 당 제1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의 자리에 오르며 마오 후계자 경쟁에서 앞서가기 시작했다. 이후 1976년 9월 9일 마오가 죽고나서 당 주석 자리를 놓고 사인방과 반사인방 연합의 치열한 정치 투쟁이 시작되었다. 반사인방 연합은 신속히 왕훙원과 장춘차오, 장칭 등 사인방 세력을 체포하였다. 사인방 세력을 처리한 화궈펑은 당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되었다. 하지만 화궈펑은 애초에 중앙에서의 활동 경력도 부족하고 지지 기반도 매우 약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가 당 주석에 오를 수 있던 이유는 마오가 유언으로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마오의 기존 노선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당시 심각한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노선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마오가 남긴 유산인 계급 투쟁·계속혁명을 강조하며 그와 반대되는 경제 건설을 추구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집권
사인방이 무너지자 사인방에 반대하여 실각당했던 당 간부들이 재등장하였다. 덩샤오핑도 이중 하나였으며 덩샤오핑의 등장은 지지 세력이 약했던 화궈펑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화궈펑은 그의 복귀를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덩샤오핑은 조건부로 당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7년 7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모든 직무에 복귀하였다. 이어진 화궈펑의 범시파와 덩샤오핑의 실천파의 대결은 대중들의 지지와 당내의 강력한 지지세력을 갖춘 덩샤오핑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문화대혁명과 1976년 4월 5일 천안문 사건을 새롭게 평가하는 과정에서 화궈펑은 정치 권력을 잃었으며, 그의 경제정책 실패와 1979년 2월 벌어진 중월전쟁에 대한 책임도 그의 실각에 한 몫을 하게 되었다. 1981년 6월 화궈펑은 당 주석직에서 물러난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관점들
권력투쟁설
문혁 연구에서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다. 문혁을 정치학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마오쩌둥이 문혁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여 권력을 다시 되찾으려 했다는 주장이 주를 이룬다. 권력투쟁설은 다시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과 넓은 의미의 권력투쟁설로 나뉜다.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은 당 지도부 내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마오쩌둥이 권력을 다시 사로잡기 위해 대중을 선동해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59년 마오쩌둥은 일선에서 물러나 류사오치에게 실권을 넘겨주었는데, 마오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당 내부의 정상적인 경로로 뒤집을 수 없었던 마오가 대중을 선동하고 부추겨서 집권파를 제거하고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실각하고 마오는 권력을 재장악하였다.
넓은 의미의 권력투쟁설은 개인의 야욕만으로 설명하기보다, 권력다툼의 배경으로 '노선 대립'을 제시한 설명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마오가 자신의 노선을 추구하기 위해 대중을 선동시켜 정적을 제거, 권력을 재장악했다는 설명으로 귀결되어 기본적으로 권력투쟁설에 해당한다.
한계
분석의 시야를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로 한정하고 있다. 문혁 전체 과정을 마오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고 본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실각과 마오의 권력 재장악을 핵심적으로 파악하고, 반면에 문혁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덜 주목한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1966년 8월 8기 11중전회, 혹은 더 늦게 10월의 중앙공작회의에서 류사오치가 사실상 권력을 잃은 국면에서도 대중적 공세를 강화했던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대중은 마오가 선동하고자 하면 쉽게 선동할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이며, 문혁의 전체 과정 동안 동질적인 세력이었던 걸로 간주된다. 하지만 문혁 과정 동안 대중들은 각각 매우 상이하고 분열적이었으며, 항상 마오의 호소와 통제에 따라 움직였던 것도 아니었다. 만약 대중이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였다면, 1967년 이후 마오가 대중에 대한 통제력을 잃거나 군을 개입시켰던 일련의 과정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우한 7·20 사태 등) 한편, 마오쩌둥의 '계속혁명론' 즉 사회주의 하에서도 늘 자본주의로 복귀할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것들이 그저 권력을 재장악하려는 시도를 보기 좋게 포장하는 명분에 불과했다면, 문혁 기간 중에 반복해서 등장한 파리코뮌 모델을 모방하려던 노력들과 새로운 제도적 실험들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덮여버리게 된다.
중국 정부의 공식 평가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인민공화국 성립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關於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가 발표되었다. 이 문건에는 4천여 명의 당 간부와 이론가들이 동원됐으며 만장일치로 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 문건의 완성을 위해 15개월의 기간이 소요됐다고 알려졌으며 덩샤오핑도 이에 심혈을 기울였다. 덩샤오핑은 마오의 실수나 잘못은 비판하되 혁명적 합법성과 국가 정통성을 위해서 마오의 공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줘야 된다고 강조했다. 결의는 마오의 업적을 높이 샀지만 그의 마지막 통치 20년의 잘못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여기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큰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10년에 걸친 재난으로 평가되었다."[6]
문화대혁명 연표
참고문헌
백승욱, <<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살림출판사, 2007 ISBN 978-89-522-0661-9 04080
오쿠무라 사토시, <<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박선영 역, 조합공동체 소나무, 2001 ISBN 89-7139-535-4 93910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임상범 역, 일조각, 2003 ISBN 89-337-0440-X 03910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김수영 역, 이산, 2014 ISBN 978-89-87608-41-9 04910
진충민·시쉬옌, <<문화대혁명사>>, 이정남·하도형·주장환, 나무와 숲, 2005 ISBN 89-88138-10-4 03910
- ↑ 진충민·시쉬옌, <<문화대혁명사>>, 이정남·하도형·주장환, 나무와 숲, 2005, 109p.g.
- ↑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일조각, 임상범 역, 2003, 86p.g.
- ↑ 전리군,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하)>>, 한울아카데미, 연광석 역, 2012, 80p.g.
- ↑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일조각, 임상범 역, 2003, 95p.g.
- ↑ 전리군,<<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하)>>, 한울아카데미, 연광석 역, 2012, 84p.g.
-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2>>, 김수영 역, 이산, 2014, 624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