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다
천보다(陳伯達: 1904~1989)는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이었지만 1970년 자아비판과 함께 숙청되었다. 천보다는 일찍이 1930년 후반에서 1940년 초 옌안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의 결합으로서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체계를 정식화해내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당내 공식노선으로 정립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고, 옌안 정풍운동을 통해 당내 마오의 이론/이데올로기적 위치를 견고하게 만든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또한 『마오쩌뚱 선집』의 편집자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골간인 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과 헌법안을 작성한 인물이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오면 문혁의 핵심 강령이라 할 수 있는 <문혁 16조>의 초안 또한 그가 작성하였으며 중앙문혁소조 의 소조장을 맡았다.
천보다와 덩샤오핑
천보다와 덩샤오핑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는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천보다가 덩샤오핑 실각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가 문혁 촉발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점이라는 두가지 배경 때문인지, 그는 아직도 복권되지 않은 문제인물이며 금기시되는 인물에 속하고 있다. 더욱 주목할만한 것은, 천보다가 1957년 반우파투쟁과 문화대혁명 초기 공작조 파견 두 가지가 덩샤오핑에 의해 연결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천보다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모두를 비판하긴 했지만, 류사오치를 비판할 때는 마오에게 등을 떠밀린 듯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천보다와 덩샤오핑 둘은 서로에 대해 "덩은 잘못된 노선의 최선봉", "덩, 이 자는 총명함을 믿고 타고난 백과사전인 양 모르는 것이 없고 깨닫지 못한 것이 없어 조사연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문제를 결정해 버린다", "덩과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참으로 하늘에 올라가기보다 어렵다", "천보다 이 인간에 대한 내 인상은 아주 자만감이 넘치고 허세를 떨치며 종래 자아비판을 한 적이 없다는 것", "천보다는 여러 해 동안 어떤 일도 맡은 게 없고, 이런 붓쟁이들은 늘 이해해 달라고 해서, 그에 대한 인상은 별다른 게 없다", "이런 나쁜 놈의 과거가 그렇게 드러난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라는 등 신랄하게 공격했다.
참고자료
백승욱, 「천보다를 통해 본 중앙문혁소조와 문화대혁명」
백승욱,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