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궈펑
요약
1976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화궈펑(華國奉)은 짧은 통치 기간으로 인하여 과도기적 지도자로 불렸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가지고 있던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뿐만 아니라 국무원 총리까지 겸직하였기 때문에 공식적 직위로 보았을 때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한 지도자였다. 더구나 당시에는 중국에서 지도자의 종신제가 유지되었다. 화궈펑은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마오쩌둥 사후 발생한 문화대혁명 4인방과의 권력투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으며, 마오쩌둥의 후계자라는 점을 활용하여 지지세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화궈펑은 자신이 문혁 시기 급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이 지명한 계승자라는 점에서 문혁의 수혜자이자 계승자였으나 동시에 사인방의 감금을 통해 문혁을 끝낸 문혁의 종결자였다.[1] 그렇기에 화궈펑은 이후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가 모두 옳다’는 이른바 양개범시론(兩個凡是論)을 내세워 문화대혁명을 옹호하며 덩샤오핑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이후 해방된 간부, 군 원로 및 지방의 군 실력자 등 복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궈펑과 덩샤오핑의 직접적인 대결은 필연적 결과였다. 덩샤오핑은 이에 대해 실사구시론 등을 내세웠는데, 이들의 일련의 대립은 '진리투쟁토론'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궈펑은 무리한 신약진정책을 추진하였고 투자 대비 최악의 결과를 낳은 1978년의 경제 실적에 따라 전면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대로 덩샤오핑은 실사구시에 입각한 현대화 과제를 제기하며 지지세력을 확산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1980년 제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화궈펑은 1980년 국무원 총리직, 1981년에는 당 중앙 주석직과 중앙군사위 주석직에서 사임하였다.[2] 총리직은 자오쯔양, 당 주석직은 후야오방,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덩샤오핑이 각각 승계하였다. 화궈펑은 이후 1992년 중국 공산당 대표, 중국 공산당 중앙당학교 교장,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하는 등 당에서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전과 같은 위치를 회복하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