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
진수(陳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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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233년 |
사망 |
297년 |
생존시기 | 촉한(蜀漢) ~ 서진(西晋) |
주요 작품 | 삼국지(三國志) |
관련 활동 | 역사학 |
개요
자는 승조(承祚)이며 익주(益州)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출신이다. 중국 서진(西晉) 시기의 역사가로 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저자이다.
생애
촉한 시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같은 군 출신의 유명한 학자인 초주(譙周)를 사사하였다. 이후 촉한(蜀漢)에 사관하여 관각령사(觀閣令史)의 벼슬을 지냈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당시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있던 환관 황호(黃皓)의 비위를 거슬러 좌천당한다. 또한 부친의 상중에 병이 걸렸는데 하녀에게 약을 지어오도록 한 일로 인해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혀 벼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1]
서진 시기
진수는 촉한 멸망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서진의 사공(司空) 장화(張華)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효렴(孝廉)으로 천거하면서 파군중정(巴郡中正)의 벼슬을 지내게 된다. 이 때 ‹파촉기구전(巴蜀耆舊傳)›의 저술을 맡아 쓰는데, 완성한 이후에도 내용이 불충분하다 여겨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 10편을 더해 지으니 무제(武帝)가 기뻐하며 벼슬을 좌저작랑(左著作郞)의으로 높혀주었다. 오(吳)의 멸망 이후
평가
- «화양국지(華陽國志)»
초주에게 수학하며 «상서(尙書)»와 «춘추삼전(春秋三傳)»을 익히고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정통하여 총명하며 기민하고 문체가 아름다웠다.
- ‹진수열전›
서사에 밝아 좋은 관리로서의 재주가 있다고 칭해졌다. 하후담이 이때 위서를 썼으나,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는 자신의 책을 찢어버리고, 쓰던 것을 멈추었다. 장화는 삼국지를 극히 높게 평가하고, 진수에게 이후에는 진서를 맡아 써주도록 부탁했다. 당시의 평가는 이렇듯 높았다.
- «사통(史通)»
양주대중정(梁州大中正) 범군(范頵)이 표를 올려 아뢰기를, “(진수가 쓴) 삼국지는 (일의) 득실(得失)에 밝고, 언사(言辭)가 권면하고 경계하는 것이 많으며, 풍화(風化-덕으로써 백성이 교화되는 것)에 유익하니, 원컨대 채록(採錄)하라 하소서.” 하였다. 이에 하남윤(河南尹)에게 조서를 내려 (진수의) 집으로 가서 그 책을 베끼게 하였다.
삼국지 관련 일화
제갈량, 제갈첨 부자와의 갈등
«진서»에는 진수의 부친이 제갈량에게 모욕을 당했기 때문에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하면서 제갈량과 제갈첨 부자를 폄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수열전›을 살펴보면 진수의 부친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일화로 유명한 마속의 참군으로, 마속이 가정 전투의 책임을 지고 참형을 당할 때 연좌되어 머리털이 깎이는 곤형(髠刑)에 쳐해졌다고 전해진다. 이 일로 제갈첨 또한 진수를 가볍게 여기자 진수가 앙심을 품었고, ‹제갈량전›에 "제갈량은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군략과 임기응변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 고 하였으며, 무장이었던 제갈첨을 "시서화에 능하며, 실제로 행한 일보다 큰 명성을 얻었다." 라고 평하여 두 사람을 깎아내렸다는 것이다.
유지기 또한 그의 저술 사통에서 진수가 자신의 아버지가 곤형을 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제갈량을
하지만 진수가 제갈량전을 편찬하며 진무제(晉武帝) 사마염(司馬炎)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면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 진수 등이 말씀 올립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著作郎)으로 있을 때 시중(侍中) 영중서감(領中書監) 제북후(濟北侯) 신 순욱(荀勖), 중서령(中書令) 관내후(關內侯) 신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신으로 하여금 예전 촉 승상 제갈량의 옛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고 험조한 곳에 의지해 복종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말을 기록하고 부끄럽고 착한 말을 남겨두니, 이는 실로 대진(大晉)의 광명 지덕함이 무궁하게 끼친 것으로 자고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중복된 것은 삭제하고 서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 모두 24편으로 만들었고 편명은 앞에 적은 대로입니다.
…중략…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진수는 274년에 제갈량의 병서(兵書) 24편을 수집하여 제갈량집(諸葛亮集)을 지은 일이 있었고, ‹제갈량전›의 편찬에 있어서는 제갈량의 업적을 빠짐없이 적느라 ‹제갈량전›의 길이가 ‹무제기›와 비슷한 지경이었다. 이에 진수는 무제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제갈량전의 말미에 아예 상소문을 함께 기술하여 화를 피하고자 하였다. 제갈량이 적국의 승상이었음에도 황제의 진노를 살 것을 감수해가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임기응변과 용병술이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는 한 문장만을 두고 제갈량을 폄하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배송지 또한 주석을 통해 ‹제갈량전›의 기록을 두고 진수가 제갈량과 제갈첨을 고의적으로 깎아내리고자 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것은 완전한 오류이다. 진수가 올린 제갈량전에 있는 제갈씨집 상주문을 읽으면 이것이 단순한 비방인 것을 곧 알수 있다. 제갈첨에 대해서도 진수는 「서화에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았다」 라고 썼을 뿐이며, 이것은 칭찬하는 말이 될수는 있어도 깍아내리고 있는 말은 아니다. 제갈첨에 대해서는「아름다운 명성과 과분한 명예는 제갈첨의 실제 행위를 넘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수는 「촉의 사람들이 제갈량을 사모 한 나머지, 제갈첨이 건의하여 창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갈후가 만든것이다.」라고 하는 문맥으로 나오는 것이어, 이것은 제갈첨이 무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갈량이 얼마나 촉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일화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우리나라에 번역된 유일한 정사 ‹삼국지›인 김원중 교수의 번역본에서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촉한의 장수 진식(陳式)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한 것과 ‹진서›에서 진수의 부친이 제갈량에게 곤형을 당한 것을 근거로 진식을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의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제갈량이 부친을 죽였기 때문에 진수가 원한을 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식은 정사에서는 제갈량에게 처형당하지도 않으며, 230년 이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