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개요
조공이론의 사상적 근거
조공이론의 사상적 근거는 『맹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나라 선왕이 물었다.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에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있습니다. 오직 인자(仁者)만이 대국으로서 소국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以大事小]. 그러므로 탕왕(湯王)께서 갈(葛)나라를 사랑하시고, 문왕(文王)께서 곤이(昆夷)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직 지자(智者)만이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以小事大]. 그러므로 문왕의 조부(祖父)인 태왕(太王)께서 훈육(獯鬻)을 섬기시고,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큰 나라이면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자는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이고, 작은 나라이면서 큰 나라를 섬기는 자는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 나라를 보전합니다. ..."[1]
조공이론의 제기
페어뱅크(J.Fairbank)의 조공체제론
1941년 미국의 역사학자 페어뱅크(J.Fairbank)에 의해 '조공체제'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조공을 동아시아의 '질서'라는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통해 중국을 중시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2] 그에 따르면 조공은 제국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주변 국가들을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또한 주변 국가들은 제국(중국)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중국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도록 요구되었다. [3] 페어뱅크는 이러한 구조를 '중국적 세계질서'라고 불렀다. 즉 중국은 주변국이 중국을 중심으로 인정하는 도덕적 가치 혹은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것을 기대하고, 주변 국은 중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책봉 등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무역 이익을 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주변국은 조공이라는 체제에 동의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차원에서의 조공-책봉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적 세계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페어뱅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간적 관념을 도입한다. 즉 중국중심의 세계를 1. 중국지대, 2. 내륙 아시아 지대, 3. 외곽지대 등의 세 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다.[4] 동심원적 구조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러한 중국 중심의 세계는 결국 거리에 따라 '화'와 '이'를 구별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자연스럽게 불평등한 서열을 가진 구조가 됨을 알 수 있다.
조공체제의 양상
조공제도의 성립은 봉건제로부터 시작한다.[5] 서주의 건국 후에 주공은 봉건제를 실시한다. 이는 주 왕실의 혈족을 제후로 책봉하여 왕실의 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봉건제 하에서의 제후와 대부 등의 혈족은 예에 의해서 구속되는데, 제후의 조공은 그러한 예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주나라 천자는 책봉의 주체가 되고 제후는 조공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책봉과 조공의 예는 오직 주 천자와 천자에게 책봉을 받은 제후 간에 이루어졌던 행위로, 서주 내에서의 권력관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조공체제의 기능
- ↑ 『맹자』, 양혜왕 하, 전통문화연구회 동양고전DB 참고.
- ↑ 홍면기, 「페어뱅크 조공체제론의 비판적 검토: 중국중심주의라는 엇나간 시선의 문제」,동북아연구 Vol.33 No.2, 조선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부설 동북아연구소, 2008, p.14.
- ↑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 p.254.
- ↑ 홍면기, 「페어뱅크 조공체제론의 비판적 검토: 중국중심주의라는 엇나간 시선의 문제」,동북아연구 Vol.33 No.2, 조선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부설 동북아연구소, 2008, p.15.
- ↑ '조공체제의 양상'부분의 내용은 '유제령,「조공책봉관계의 시대적 변천을 통해서 본 한중관계사의 이해」, 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6, p.20-26.'을 참고, 요약, 정리 한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