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의 전투
부견과 전투 전개 과정
남북조시대 북조 전진의 항제 부견은 북조를 통일한 뒤 남조 동진을 병탄해 천하를 통일하고자 했다. 이때 양쪽 군사가 격돌한 싸움이 이른바 '비수의 전투'이다. 부견은 어렸을 때 부터 영특했고 할아버지 부흥 곁에서 명을 기다리면서 행동거지가 모두 예에 맞아 조부인 부홍은 부견을 크게 총애하며 매우 기뻐했다. 8세 무렵 부견은 부홍에게 선생님을 붙여달라고 요구하면서 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보위에 오른 부견은 20여 년에 걸쳐 정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에 전진이 부강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최대 최대목표는 천하통일이었기 때문에 동진을 정복해야만 했다. 양양에서 동진의 장수 주서를 포획한 후 부견은 천하통일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군신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구상을 밝힌 뒤 신하들에게 각자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게 했다. 비서감주동을 제외한 대신들 전원이 반대했으나 부견은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 부차도 강남의 월나라 구천을 포로로 잡았고. 삼국시대 말기 사마씨의 군사는 3대에 걸친 동오의 손오를 포로로 잡았다. 진나라가 장강의 험고함에 기대고 있으나 이는 큰 문제가 안된다. 수많은 우리 군사 말채찍으로 장강을 치면 가히 그 흐름도 끊을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전투를 추진했다. 당시 동진의 조정은 부견이 나라를 기울여 친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경실색하며 급히 승상 사안에게 명해 군사들을 이끌고 가 부견의 남침을 저지하게 했다. 전쟁 초기 싸움은 전진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동진의 조정이 크게 놀라 곧 모든 병사를 동원해 총력 저지에 나섰다. 동진의 용양장군 호빈이 먼저 협석을 굳게 지켰고 그는 조정에 속히 구원에 나설 것을 청하는 서신을 사석에게 보냈다. 그러나 사자는 도주에 부견의 동생인 부융에게 잡히고 말았다. 크게 기뻐한 부융은 부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부견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대군을 항성에 주둔시킨 뒤 직접 8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수춘으로 달려갔다. 이때 동진의 용양장군 유뢰가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밤에 전진의 영채를 급습하여 양성을 비롯한 전진의 대장 10명의 목이 떨어지고 병사 1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진의 군사가 여세를 몰아 수륙을 병진하며 공격에 나섰다. 당시 부융은 동진의 군사가 절반쯤 강을 거넜을 때 곧바로 공격을 가할 심산이었지만 부견의 승인을 받은 후 군사를 이동시키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때 전에 투항했던 동진의 장수 주서가 '진나라 군사가 패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는 전진의 군사로 편입돼 있던 선비족과 강족, 갈족의 병사들이 크게 놀라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진의 군사들이 일패도지하자 동진의 군사들이 승세를 이어 급박하게 그 뒤를 추격했다. 이 와중에 부융은 유시를 맞은 채 단기로 회북까지 도주했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겨우 목숨을 건진 남은 군사들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밤을 새워 달아났다. 그들은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려도 동진의 군사가 뒤쫓아 오는 줄 알고 도망가기 바빴다. 결국 동진을 병탄해 천하를 통일하려고 한 부견의 야망은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선비족과 강족, 갈족 등 여러 민족으로 병사를 구성했음에도 단지 숫자만 많은 것만 믿고 무모하게 정벌에 나선 것이다.
전투이후
비수의 전투이후 동진의 농민 봉기를 진압한 장군 유유는 420년 황제에 올라 국호를 송나라로 바꾸었다. 이후 60년이 지나지 않아 479년에 제나라, 502년에 양나라 557년에 진나라로 국호가 바뀌며 매우 짧은 기간동안 왕조 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국가는 점점 피폐해졌다. 당시 위진남북조 말기에 태어난 수문제가 북주 황실 일족을 제게하고 수나라를 세웠는데, 수문제는 남조의 진나라를 몰아내 300여년의 분열을 끝내고 두 번째의 대통일을 완성하였다.
참고문헌
신동준, 한 권으로 끝내는 통중국사, 2018
엄문명, 중화문명사 제2권 상하, 진한 위진남북조,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