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유
개요
왕국유(王國維, 1877~1927)는 청말 민국초에 활동한 학자이다. 절강(浙江)성 해녕(海寧) 출신으로, 자는 정안(靜安). 호는 예당(禮堂), 백우(伯隅)이며 만년에는 관당(觀堂), 영관(永觀) 등으로 불리었다. 문학과 역사학, 고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여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문학 방면에서는 서구사상과 중국전통사상을 비교분석하고 이를 융합하는 시도를 하였다. 역사학, 고고학에서는 갑골문, 금문(金文)을 연구하여 고고학적 업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사학과 연결시켜 갑골문 등의 기록에 근거하여 고대사의 일부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였다. 일생 동안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 등 60여 종의 저서를 남겼다.
생애
출생과 유년시절
1877년(光緖 3년) 음력 10월 29일(양력 12월 3일) 절강성 해녕 쌍인항(雙仁港)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국정(國禎)이었고, 나중에 국유(國維)로 고쳤다. 부친 왕내예(王乃譽)는 장군 왕품(王稟)의 32대 손으로, 생계를 위해 객지를 떠돌며 상인 활동을 하였다. 어머니 릉씨(凌氏)는 왕국유가 네 살 되던 해에 병사하여 어릴 때부터 작은 할머니와 고모와 자랐다.
열한 살에 부친이 조부의 상을 치르러 귀향하자 부친은 왕국유가 서당에서 돌아오면 직접 교육을 맡았다. 주로 과거시험에 필요한 팔고문(八股文)과 시첩시를(試帖詩) 연습하는 것이었다. 왕내예는 서화(書畫)와 전각(篆刻) 등을 수집하였고, 시와 사, 고문에 능하였다. 잠시 강소(江蘇) 표양현(漂陽縣)의 막료(幕僚)를 지낸 적이 있을 정도로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는 왕국유에게 소양을 기르는 데 영향을 주었다.
1892년 과거의 동시(童試)에 합격한 이후 왕국유는 해녕에서 ‘네 명의 재주꾼’ 중의 으뜸으로 꼽혔다. 그러나 과거에 흥미가 없고 《사기(史記)》·《한서(漢書)》 등 역사서와 고증학에 관심이 있던 그는 1893년 항주에서 향시(鄕試)를 다 치르지 않고 돌아왔다.
나진옥과의 만남과 학문 융합
낙방한 이후 진매숙(陳枚肅)의 집에서 훈장을 하다가 상해로 가 1898년에 언론사 《시무보(時務報)》에 들어갔다. 서기일을 하면서 나진옥이 번역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에서 일어와 영어, 수리학 등 자연과학을 배웠다. 이 시기 일본인 교사 후지타 도요하찌(藤田豊八)와 타오카 사요지(田岡佐代治)에 의해 서양 학문에 대한 기반을 쌓고 독일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나진옥의 지원 아래 일본 동경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에서 유학하였으나 각기병이 재발해 5, 6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1903년에 나진옥의 추천으로 강소(江蘇)에 있는 통주사범(通州師範)에서 심리학, 논리학 등을 가르치고, 1904년에는 강소사범학교로 옮겨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헵딩(Höffding)의 《심리학 개론》을 번역하였고 《정안시고(靜安詩稿)》 1권,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 등을 집필하였다.
1907년 봄 학부(學部, 교육부)에서 일하는 나진옥의 추천으로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어, 그 후에 교육부에서 도서관(東師圖書館)을 만들면서 도서관의 편역 작업도 하게 된다. 편집자, 번역자, 행정가로 겸직하면서 관심 분야인 희곡을 연구하여 1913년 초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를 출판한다.
국학으로의 전향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왕국유는 나진옥과 일본으로 망명하여 교토(東都) 다나카촌(田中村)에 정착하였다. 그는 나진옥을 도와 매일 교토대학으로 가서 그의 장서를 정리하여 생활을 유지하였다. 학자적 의무로 국학을 연구하기를 바란 나진옥의 권유와 왕국유의 학문적 관심, 고고학적 유물이 다수 발견되던 당시 상황에서 그는 중국 속문학에서 국학으로 학문을 전향한다. 귀국 전까지 중국 고대의 사료(史料), 기물(器物), 문자, 음운 등의 고증 작업에 종사하였다.
1916년에 상해로 돌아와 유태인 하둔(Silas A. Hardoon)의 제안으로 창성명지대학(倉聖明智大學)에서 학술 간행물인 《학술잡지》의 편집자로 일하였다. 1917년에는 《은복사중소견선공선왕고(殷卜辭中所見先公先王考)》과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을 저술했다.
1923년 청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부름을 받고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로 임명되었다.
1925년 청화대학(清華大學) 국학연구원 역사학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곳에서 서북변경지리와 요(遼), 금(金), 원(元)대 역사를 연구하였다. 왕국유는 양계초(梁啓超), 진인각(陳寅恪)과 함께 가장 명성이 높아 ‘삼거두(三巨頭)’로 불리었다.
죽음
개인적인 사건과 청 왕조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비관하던 중 1927년 6월 2일 베이징에 위치한 황실정원 이화원(颐和園) 곤명호(昆明湖)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그가 입은 옷 속에서 삼남 정명(貞明) 앞으로 쓰인 유서가 발견되었다.
오십 평생에 다만 죽음 하나가 모자라는구나,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 내가 죽은 뒤에는 마땅히 대강대강 염을 해서, 즉시 청화 묘지에 장사를 지내어라. 너희들은 남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잠시 성내에 거주해도 좋다. 너희 형 또한 급히 상을 치르러 달려올 필요는 없다. 도로가 불통되었고 또한 일찍이 집 밖을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적은 진인각, 오복(吳宓) 두 선생에게 처리해달라고 부탁해라. 집안사람들은 알아서 수습하여 반드시 남쪽으로 돌아가지 못해서는 안 된다. 내가 비록 너희들에게 남겨줄 재산이 없지만 그러나 만약에 근신하고 근검하면 또한 반드시 굶어죽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6월 초이틀에. 아비 씀.
그의 자살 이유에 대해서는 청나라를 위한 순국, 비관주의적 인생관 등 지금까지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