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선
개요
신안선은 14세기 중국 원나라 영파(寧波)에서[1] 출발하여 일본 하카타(福岡県)와 교토(京都)로 항해하던 중 고려의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중국의 무역선이다. 명나라 초기의 하서양과 함께 중세시기 중국의 대외무역 규모를 엿볼 수 있는 사료이다. 국가 사적 274호로 지정되어있다.
발견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조업을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6점의 청자가 건져 올려졌다. 어부가 신안군청에 이 사실을 신고하여 이듬해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2],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 해역 해저 20m 지점에서 길이 28m 규모의 선박 뼈대와 흩어져있는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발굴은 9년에 걸쳐 11차례 실시되었으며 중국의 도자기, 각종 금속공예품, 고려의 고려 청자와 청동 거울, 일본의 칠기그릇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향신료와 동전 등 총 2만 7천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600여 년 간 해저에 잠겨있었으나 서해의 갯벌이 물살과 해충 등으로부터 보호 작용을 해준 덕에 갯벌에 잠겨있던 우측 선체와 유물들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침몰한 이유는 당시 중국, 고려, 일본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태풍이나 풍랑을 만나 침몰된 것으로 추측된다.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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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 없습니다 대표적이다. 특히 2만 5천여 점의 도자기는 그 종류가 방대하여 학계의 조명을 받았고 우리나라 도자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었다. 도자기는 대부분 14세기 전반 원나라 제품이지만 남송(南宋) 시기의 도자기도 일부 존재한다. 청자(약 60%), 백자와 청백자(약 26%), 흑갈유자기(약 2.4%), 균유자기, 백지흑화자기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 도자기 명산지인 절강성(浙江省)의 용천요(龍泉窯)청자와 강서성(江西省)의 경덕진요(景德鎭窯)백자이다.
다음으로는 향도구 및 향신료이다. 중세 동아시아에서는 왕실부터 서민까지 전 계층이 폭넓게 향 문화를 즐긴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또한 불교, 도교 등의 의례 시 필수품이었으므로 좋은 품질의 향도구는 고가의 무역품에 속했다. 이렇게 수요가 많았기에 동아시아 간의 무역품으로 거래된 것으로 보여진다.
향문화와 함께 중세 동아시아에 크게 유행한 것이 바로 차 문화이다. 차 문화 역시 양반 계층이 향유하는 하나의 문화로써, 멋스러운 차도구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수요가 높았다. 이미 크게 발전해있던 중국의 차 관련 자기들이 일본 상류층 귀족의 수요에 맞추어 수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파악되고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용도의 상형 도자기 역시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불상, 도교 인물상, 연적 등의 문방구류, 등잔 등이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구경했던 연적들은 너무 아름다워 집에 가져오고 싶었다.
한국과 일본의 유물
신안선에서는 고려의 고려청자 7점, 숟가락, 거울, 그리고 일본의 나막신, 무기류, 칠기그릇, 놀이도구[3] 등이 발견되었다. 아시아 3국의 바닷길은 물품의 무역 뿐만 아니라 사절단, 승려들의 활동을 위한 왕래에도 활발히 이용되었다. 특히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으로 상호간 인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양국의 생활물품이 유물로 발견되는 것을 통해 학자들은 고려와 일본의 외교사절단, 상인, 승려들이 신안선에 탑승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의 물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