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제
{{인물정보 |이름 = 만력제
|사진 = |묘호 = 신종 |본명 = 주익균(朱翊鈞) |생애 기간 = 1563~1620 |재위 기간 = 1572~1620
개요
명나라의 13대 황제로 묘호는 신종, 융경제의 셋째 아들이다. 가정 42년(1563년)에 태어났으며 살아남은 융경제의 아들 중에는 가장 장자로서 즉위 6년만에 요절한 융경제를 대신하여 황위에 올랐다.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대표적인 암군 중 하나이나 임진왜란을 맞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은인이다. 재위기간은 48년에 달했는데 이 중 30년간 정사 업무를 거부하였다.
생애
장거정의 개혁정치 시기
열 살의 나이로 등극한 주익균이 천하를 다스리기에 어렸는데, 이 태후는 국정을 다스리지 않고 고공(1513~1578), 장거정(1525~1582), 고의(1517~1572) 등 고명대신에게 맡겼다. 그러나 권력다툼에서 고공이 불경한 말을 한 것을 빌미로 고공을 몰아낸 뒤 권력을 쥐게 된다. 황제가 추태를 부렸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 태후는 장거정에게 황제를 꾸짖는 상소를 준비하게 하고 아울러 황제 자신이 죄과를 인정하는 어찰의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황제는 잘못을 일일이 지적받은 후 못난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일어났다. 만력 연간의 첫 10년 동안 내각의 수보 장거정은 커다란 권한을 쥐었고 국고에 잉여금을 축적했다. 장거정은 불필요한 관직에 있던 자들을 기꺼이 공격했으며, 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고자했다. 신종은 내각수보 장거정을 존경했으며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장거정은 만력초기 연간동안 정치개혁을 단행했는데, 관리들의 부패기 국가의 패망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여 관리들의 고과를 엄격하게 평가하기 위하여 ’고성법(考成法)‘을 시행했다. 이로써 국가의 수입이 증대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과 토지 측량을 실시했다. (일조편법은 각종 세금의 납부를 토지세 중심으로 일원화 하고 은으로 납부하는 것이다) 이로써 세금의 일원화가 되었고 백성들에게 세금이 공평하게 납부되었다. 토지 장부를 기록하는 서리들이 매수된 경우 납세 의무가 힘없는 이들에게 전가되기 일쑤였기에, 1580년, 장거정은 토지 조사의 진상을 규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 국토의 현황을 재조사한 다음 새로운 토지 장부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사실 그 의도는 정의보다는 국가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였지만 똑같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 ‘세금을 부과할 목적으로 모든 토지를 재조사하니 한 치의 땅도 누락하지 말라’라고 명령했지만, 새로운 토지 장부 작성을 위해 정보를 확보하던 중인 1582년에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명이 지배하는 모든 영토에 정밀한 행정망을 갖추려던 꿈이 완성되지 못했다. 이와 더불어 만력제가 어선을 준비하는 비용으로 은자 10만냥을 요구했으나 재난 대비를 위해 국고를 낭비해서는 안 되며 근검절약만이 백성의 편안함을 부르는 것임을 상소했다. 하지만 사후 모함에 의해 대역죄인의 누명을 쓰게 된다.
친정과 일탈
만력제는 관료들의 도덕적인 공격에 염증을 느껴 황제의 역할을 외면했다. 정부의 행정업무를 봉쇄하고 무시했으며 수년간 대신들의 접견을 포함하여 정사 업무를 거부했다. 만력제의 개인적인 반란으로 인해 명조 행정기구는 인원부족을 겪었다. 이뿐만 아니라 태자 책봉에 있어서도 귀비 정씨를 총애하여 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지만 유가의 법도에 맞지 않아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결국 19년 뒤인 1601년에 태자로 책봉한다. 신종은 여색을 밝힐 뿐만 아니라 동성연애자이기도 했는데 총애하는 10명의 미소년을 모아 십준이라고 불렀다. 만력제의 여색, 재물, 술 등 일탈이 계속되고 24세에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자 이때부터 정사를 처리하지 않고 유지(諭旨)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중국 역사상 만력제만큼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황제는 드문데, 재위 48년동안 궁실의 건축이 끊이지 않았으며 본인의 황릉인 정릉 건설에만 은자 800만냥을 소모했다. 만력제의 실정과 환관세력의 부패로 강남지역은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곳의 유학자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관료들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만력제 사후인 1620년대에는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잡았고 동림파의 학자들을 탄압한다. 명말의 붕당정치는 활력과 지도력이 필요하던 시기에 관료사회를 분열시키고 황제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만력제 시기에는 황제가 승인하여야만 진행할 수 있는 일들이 실행되지 못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사형의 집행 같은 일이나 사직서의 처리가 그러하다. 지배층의 사치와 지나친 군비로 인한 국가재정의 확대는 농민부담을 가중시켰다. 만력 연간에는 다른 대에 비해 상당수 증액된 예를 볼 수 있는데, 선친인 융경 초년에 군비 지출이 280만 냥이었던 것이 만력 중기에 이르면 그 액수가 380만 냥을 넘는 과다한 지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일반회계로 지출된 이러한 예산 외에도 만력 연간에 전비로 지출된 통계를 보면 수천만 냥의 추가 지출이 있었음을 감안할 때 가히 군비로 지출된 양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무도한 사치풍조와 과다한 군비 손실에 따른 부담을 결국 농민이 모두 떠안으면서 농민들은 농토를 등지고 유랑하거나 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군의 농민들은 집단적으로 봉기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명나라 말기 농민봉기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임진왜란과 그 이후
만력삼대정은 만력제 시기에 있었던 세 번의 큰 전쟁을 말한다. 귀화한 몽골 장군이 일으킨 발배(보바이)의 난에서는 진압하기 까지 반년이 소요되었으며 은 180만 냥의 양이 소모되었다. 발배 부자는 명군의 군기가 문란한 것을 보고 반란의 마음을 품었으며 부족을 은밀히 규합해 사병을 양성했다. 만력제는 조정에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지만 종묘사직이 걸린 일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만 대신들을 직접 대면하여 계책을 논의하지 않고 조칙을 내리는 방식으로 정국을 통제했다. 결국 내분과 발배의 자살로 막을 내린다.
만력삼대정 중 하나이고 만력동정 중 하나인 임진왜란에서 왜군을 맞은 조선에의 출병에 힘썼다. 만력제가 황제로서 장거정의 개혁정치 시기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처리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0만의 군사를 약속하여 송응창을 경략에 임명하고 도독 이여송을 제독으로 삼아 군사를 통솔하여 왜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만력제의 칙서였다. 무리한 출병 때문에 명나라의 국고가 바닥나고 여진족의 성장과 맞물려 명나라 주요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 출병에 막대한 재화를 소모하고도 황궁을 호화롭게 꾸미고 사치를 일삼았다. 조선의 이항복은 명나라를 방문했을 때 만력제가 얼마나 사치스러웠는지 비판했다. 만력제의 방탕과 무능은 중기 이후부터 국가 해체의 지경에 이르렀고, 전국 각지의 관료의 절반에 가까운 자리가 공석이었다. 이에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루었다. 조선의 선조는 만력제가 죽자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표현으로 그의 공덕을 찬양했다. 1619년에는 후금과 명이 벌인 대전인 살이호전투가 일어났다. 명나라는 관리와 장수 300여명과 병사 4만 5천여명을 잃었으며 변경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조선군도 파병되었으나 후금이 크게 승리하고 요동지역을 내주게 되었다.
용의 출현
용은 나라의 멸망을 예고하는 하늘의 징조라고 원나라 시기부터 여겨졌다. ‘용이 지나간 지역은 황량하고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어 모든 것이 시들고 초토화되었다.’고 1355년의 한 수필가는 말했다. 용이 등장하면 왕조의 운명이 시들 때였고, 적어도 전염병이 들고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일이 생겼다. 만력 연간에도 많은 용이 나타났는데 이 중 가장 큰 사건은 1586년 8월 29일로, 남경 서편 향촌의 상공에 1587마리의 사나운 용이 나타나 언덕을 날려버리고 전토를 파괴하고 수천명을 익사시켰다. 이후 용들은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1628~1644)때까지 줄기차게 나타났는데, 1643년에 나타난 용을 끝으로 이듬해 봄 명은 무너졌다.
참고문헌
하버드 중국사 원·명 : 곤경에 빠진 제국, 티모시 브룩 저, 너머북스, 2014.10.16.
명말 청초 사회사상, 김덕균 저, 한국학술정보(주), 2007.04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강정만 저, 주류성, 2017.06.26.
신중국사, 존 킹 페어뱅크, 까치, 2005.01.30.
명사 외국전 역주. 3, 외국전 하, 송정수 외 저, 동북아역사재단,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