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마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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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B.C 145? 하양夏陽 (중국 섬서성 한성漢城) |
사망 |
B.C 91?(추정년도) |
생존시기 | 중국 전한시기(한 무제 시기) |
주요 작품 | 사기(史記) |
관련 활동 | 역사 |
사마천(B.C. 145? ~ B.C.93?)은 중국 고대 전한시기 역사가이다. 그의 작품인 <<사기>>는 중국의 가장 오랜 시대의 장대한 역사기록으로 공자가 <<춘추>>를 저술한 뒤로 오랫동안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하였던 대사업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이의 저자인 사마천은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목차
사마천의 집안내력
사마천의 집안내력은 전설 시대부터 몇 천 년에 걸친 가문의 전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마천은 그 스스로 몇 천 년에 걸친 가문의 전승을 언급하고 있다. 사마천은 전설 시대 전욱제(顓頊帝)까지 자신의 가문을 소급(遡及)시켰는데 이것은 가문의 유구함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사마천은 사마(司馬)씨 집안에서 배출된 인재들을 스스로 <<사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생애
소년기~
사마천은 하양(夏陽)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하였다. 사마천의 총명함은 훌륭한 가정환경 속에서 더욱 발휘된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10세에 고문을 줄줄 욀 정도가 되었다. 후에 태사령이 된 부친을 따라 장안에서 살게 되면서 배움의 영역이 넓어졌다. 또한 사마천은 동중서(董仲舒)에게 <<춘추>> 및 유가의 학문을 배우고 공안국(孔安國)으로부터 <<고문상서>>를 배웠다. 이 때의 교육은 훗날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사마담은 사마천의 장래를 무척 생각했다. 장차 사관을 맡을 관직에 종사하게끔 배양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사마담은 <<사기>>를 사마천과 함께 완성하게 되기를 꿈꾸었다. 사마담은 사마천이 스무 살 때 사학가로서 안목을 넓히게 하기 위하여 목적성을 띤 여행을 시켰다. 이 장도(壯途)에 오른 여정은 남쪽으로 장강과 회수 유역으로 유람하며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우혈(禹穴)을 탐방한 다음 구의산(九疑山)을 살피고 원강(沅江)과 상강(湘江)은 배를 타고 돌았다. 북으로는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도읍에서 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공자의 유풍을 살핀다. 추현(邱县)과 역산(嶧山)에서 향사(鄕射: 활쏘기 의식)의 대례에 참여하고 파현(鄱縣)과 설현(薛縣)을 유람 후 다시 양나라(梁)와 초(楚)나라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스무 살 사마천의 여행은 방대한 사회적 지식을 얻게 했고 숨겨진 옛 이야기와 문서들을 찾게 해주었다. 사마천의 시야와 가슴은 넓어졌고 식견과 재능도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이 <<사기>>가 성공할 수 있는 중대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낭중으로 벼슬에 나서다
20세 때 시작한 장도를 끝내고 몇 년 뒤 사마천은 낭중(郎中)이란 벼슬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관직 생활에 발을 디딘다. 사마천은 낭중이 된 후 한 무제(武帝)를 모셨다. 낭중으로 입사한 사마천의 관직 생활에서 주목되는 사건은 무제와의 지방 순시였다. 무제는 기원전 113년부터 본격적인 지방 순시에 나서는데 사마천이 이 순시를 수행했다는 것은 사마천에 대한 무제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사마천은 그 후 무제의 거의 모든 순시에 수행하여 민정을 살폈다. 지방 순시에서는 대개 제사 및 신선을 구하는 행위 등 각종 제사가 함께 이뤄졌는데 무제의 이런 행위를 함께 수행하며 지켜본 사마천은 훗날 <<사기>>를 저술하면서 「봉선서」라는 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제왕들의 제사 행위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기술하였다.
한편 기원전 112년 무제의 명령을 받고 사마천은 다시 무제를 수행하여 서쪽 지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이어 이듬해 무제의 명령을 받고 서남이(오늘날의 사천성, 귀주성, 운남성에 해당하는 지역) 지방에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지방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로써 민정과 민속을 깊이 이해하고 정보자료까지 파악하였다. 이러한 경험의 확대는 역사 서술에 대한 열정을 확고하게 다지도록 자극했고 사마천의 의식 수준과 현실에 대한 인식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어간다.
태사령에 임명되다
원봉 3년(B.C. 108)은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이 세상을 뜬 지 3년째 되던 해이다. 원봉 3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되었고 사관의 기록과 나라의 책을 소장해두는 석실과 금궤의 서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제 당시의 태사령은 녹봉 600석의 하급 관리로 현령 정도에 해당했으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 태사령은 문학과 역사, 천문과 역법 등에 익숙하여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대한 제도의 개혁이나 의례의 절차를 제정하고 실시하는 일에도 태사령은 모두 참가해야만 했다.
38세의 나이로 태사령이 된 이후 사마천의 생활은 오로지 일뿐이었다. 조정에서의 직무에 충실한 한편,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역사서 편찬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전과 다름없이 무제를 수행하여 지방을 순시했고 기원전 104년 새로운 역법, 태초력을 개정하기도 했다.
<<무릉증서>>에 따르면 “사마담이 태사승(太史丞)에서 태사령이 되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태사승이란 직책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사령 이전 단계로 그 직무는 태사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마담은 태사승으로 입사했고 그때 사마천의 나이는 일곱이라고 한다.
이릉의 화를 당하다
한나라는 개국 이래 줄곧 흉노의 위협을 받아왔다. 흉노에 대해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친을 이루기도 하였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 대장군 위청(衛靑)과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이 흉노와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기원전 114년 흉노의 우두머리 이치사(伊雉斜) 선우(單于)가 죽으면서 쌍방이 모색해오던 화친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중에 흉노는 마음을 바꾸어 한나라의 사신인 노충국(路充國)등 10여 무리를 잡아가둠과 동시에 부단히 변경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100년 저제후(且鞮侯) 선우(單于)가 막 즉위하자 흉노는 한나라의 기습을 두려워하여 몸을 낮추는 한편 억류시켰던 사신들을 돌려보내는 등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다. 이에 한 무제도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를 사신 삼아 한나라에 구류되어 있는 흉노의 사신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소무가 흉노에 도착하자 태도를 바꿔 소무를 구류시켰다.
이에 이듬해 기원전99년 한 무제는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에게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무제는 이릉에게 이광리의 후방을 담당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릉은 자신이 부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무제는 이릉의 청을 허락하였다. 이에 이릉은 보병 5천 명을 거느리고 흉노 진영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이릉은 준계산에서 흉노 선우의 3만 기병을 만났고 이릉은 흉노를 맞이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흉노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병사를 잃어 다시 8만 명의 군사를 증원하여 포위 공격하였다. 이릉은 싸우면서 후퇴하였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릉의 부하 중 한 명이 흉노에 투항하였고 결국 이릉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에 무제는 분노하였다. 이릉이 장렬하게 전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기대와 달리 투항하였기 때문이다. 이릉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제는 먹지도 않고 조정 회의에서는 정무를 보아도 기뻐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모두 이릉이 유죄라고 노하여 질책하였다. 무제는 당시 태사령에 있던 사마천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무제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이릉을 극구 두둔했다.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매일 똑같은 의견만 듣는 무제의 답답함을 풀어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순박한 충정이 도리어 무제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언급한 작전상 실수가 궁극적으로 이광리(李廣利)를 지목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이광리는 다름 아닌 무제의 처남이었다. 한 무제는 무자비했다. 사마천을 당장 감옥살이를 시켰고 관리들의 논의에 따라 사마천은 사형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당시 법률규정에 따르면 사형은 50만 전으로 대체될 수 있었고 부형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결국 가난한 사마천은 <<사기>>의 집필을 위해서 부형이란 치욕을 선택했다. 이후 기원전 96년 사마천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중서령(中書令)이란 직책을 받고 복직했다.
이릉의 화를 당한 것은 사마천의 입장에서 치명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시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았고 수도 없이 자결을 생각했다. 사마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수치와 고통을 극복하고 인간과 제도와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체득했다. 이런 경험 이후로 그는 모든 사실을 근거 위에서 검토하며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칭찬받을 것은 칭찬했고 비난받아 마땅하면 비난했다. 이로써 <<사기>>는 지배자의 역사서에서 민중의 역사서로 거듭났다.
사마천의 죽음
사마천의 죽음(약 B,C. 91? 추정)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겨져 있다. 임안에게 보낸 답장 이후로 그의 행적은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 때문에 후대 학자들은 그의 탄생 연도 못지않게 열띠게 문제를 제기해왔고 그래서 그의 죽음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정사 중에는 사마천이 죽은 해와 사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뒤 별 탈 없이 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도 말하고 사마천의 죽음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 이 때문에 사마천의 죽음과 그 연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업적
태초력
기원전 104년 사마천은 공손경(公孫卿), 호수(壺遂) 등과 글을 올려 역법 개정을 건의했다. 무제는 어사대부 아관(兒寬)에게 여러 박사들과 논의하도록 했고 아관(兒寬) 등도 모두 동의하여 구체적인 의견을 제출했다. 이에 무제는 공손경, 호수, 사마천 등에게 한나라 역법을 만드는 일을 논의케 했다.
새로운 역법의 이름은 태초력(太初曆)이었다. 이에 원봉 7년을 태초(太初) 원년(B.C. 104)으로 개원 하였다. 이 역법은 실측과 장기적인 천문기록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법은 하루를 81분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팔십일분력(分曆)’이라고도 불렀다. 이전까지 한나라는 10월을 첫 달로 하는 진나라의 역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초하루와 그믐에 달이 보이고 상현과 하현 때 보름달이 나타나는 등 날짜와 천문현상이 맞지 않았다. 태초력은 정월을 한 해의 첫 달로 규정하여 이 문제를 극복하였다. 또한 24절기가 역법에 안배되었고 윤달도 배정되었다. 이밖에 일식 주기도 계산되었고 5성(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의 위치를 추산하는 정밀한 방법도 수립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태초력은 2천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줄곧 사용되고 있다.
사기
참고문헌
사마천, <<사기열전 3>>, 김영수, 최인욱 역, 신원문화사, 2006 ISBN 978-8935-91351-0
양치엔쿤, <<사마천과 사기>>, 장세후 역, 연암서가, 2004, ISBN 978-89-94054-76-6 03990
김영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창해, 2006, ISBN 89-7919-738-1
노윤희, <사마천의 생애와 작품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