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당의 건립
수말의 농민 대기의는 수왕조를 전복시켰지만 승리의 결과는 태원 유수 이연에게 돌아갔다. 이연은 관롱 지주집단의 대귀족으로, 조부였던 이호는 서위 팔주국의 1인이자 북주의 개국공신이기도 하여 사후 당국공으로 추봉되었었다. 이연은 수의 붕괴가 반전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아들인 세민과 함께 병력을 모아 반수 거병을 모의하였다. 이때 전국의 정치,군사의 형세는 이연의 거병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617년 5월 이연은 드디어 돌궐과 유무주의 태원 침공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징집하여 부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살해하고 진양에서 반수의 가치를 들었다. 이후 이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유를 황제로 추대한 후, 양제는 태상황에 추존하였고 스스로는 대승상,당왕의 직위를 갖고서 군정 대권을 장악한 후 618년에 양제를 시해한 뒤에 이연은 양유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당조를 건립하고 무덕이라 개원하니 그를 당고조라 칭한다.
통일사업
그 후 법령을 간소화 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군사상으로는 각지의 할거 세력에 대하여 원교근공의 책략에 입각하여 전국 통일의 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623년에 하북으로 진군하여 두건덕의 잔존 부대인 유흑달을 소멸시키고 하북 지역을 확보한 뒤 624년 강회로 진군한다. 628년 돌궐에 의지하던 양사도가 부하에게 살해되어 당은 전국통일을 하게된다.
당 태종
당 태종 이세민은 이연의 둘째 아들이다. 이연이 진양에서 거병하여 관중을 함락시키고 군웅을 제압하면서 전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의 공적은 매우 두드러졌다. 이리하여 이세민의 명성과 지위가 상승하였다. 그 후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즉위 후 정관이라고 개원하니 그가 당 태종이다. 이 시기는 정관의 치세라고 일컬어지는 시기로 봉건사회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안정되었다. 당 태종과 군신들은 수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농민기의의 막강한 위력을 인식하고 통치에 주력하여 당좡조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였다. 또한 청정에도 노력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인재 등용에도 주의하였다. 전제군주로서 흔치않게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도 위징이라는 자의 간언이 두드러졌다.
무측천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로 그녀의 재위 기간 15년이다. 고종은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려 했으나 반대가 있자 반대하는 이들을 죽이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운다. 683년 고종의 사후 무측천은 황태후의 신분으로 정사를 관장하다가 이듬해 중종을 페위시키고 예종 이단을 왕위에 앉힌 후 스스로 정사를 좌우하였다. 이에 대한 종실 제왕 및 대신들의 반대를 무측천은 혹리의 임용과 엄형준법으로 탄압한다. 690년 무측천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주로 바꾼뒤 동도인 낙을 신도로 삼는다. 무측천은 인재 등용과 같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부정척인 측면 또한 보인다. 705년 무측천의 병세가 악화되자 일부 대신이 당 중종의 복벽을 감행하고 무주의 통치가 종언을 고하게 된다.
당 현종
712년 예종이 정쟁의 격화를 회피하기 위해 이륭기에게 왕위를 양도하나 종족간의 암투가 끊이지 않는다. 이듬해 이륭기는 태평공주와 그 측근을 죽임으로써 정쟁이 끝나고 이륭기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당 현종이다. 그의 통치 시기가 번영과 풍요의 상태를 맞이하는데 현종 통치의 전기인 30년을 개원의 치세라고 일컫는다.
당나라 중후반기
나라가 망조에 들어 후대에 가면 갈수록 환관들의 세력이 강해져 환관들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되고, 많은 황제들이 환관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또한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잃어 절도사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이를 틈타 북방 민족들의 침략이 본격화된다. 매우 어려운 혼란한 시기를 대제국 당은 150년을 버틴다.
안사의 난을 계기로 당조의 율령제는 확연히 변모한다.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수취제도인 조용조는 양세법으로 통합된다. 양세법은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제한을 없앤 제도로서 이후 국가 재정의 제도적 기반이 된다.
사회와 경제상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낳았다. 새로운 품종과 농기구의 도입, 새로운 농법의 발전, 적극적인 개간과 간척으로 농업생간력이 대대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강남지방의 방전은 눈부실 정도여서 경제의 중심지가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상공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간섭이 완화되어 상업이 발달하고, 운하망을 중심으로 교통의 요지에 대도시가 발전했으며 농촌에서도 시장이 등장했다.
- 번진체제의 성립 - 안사의 난 과정에서 반란군의 세력 확대 방지차원에서 이 체제가 성립되었다. 각지에 절도사를 두고 다수의 병력을 지휘토록 했다. 번진을 관장하는 절도사는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것과 달리 보통 관찰사와 주의 자사를 겸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한 거대한 지방세력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최고의 지방행정 단위가 되었다.
(756-762) 당 숙종 이형
(762-779) 당 대종 이예 안사의 난 진압
(779-805) 당 덕종 이괄
(805) 당 순동 이송
(805-820) 당 현종 이순
(820-824) 당 목종 이항
(824-826) 당 경종 이담
(826-840) 당 문종 이양
(840-846) 당 무종 이염
(846-859) 당 선종 이침 구보의 난 발발. 절도사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 채 부임지의 통치에는 관심이 없는 상황으로 인해 농민들 은 부담만 가중되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 또한 악화되는 상황에서 구보의 난이 발발함.
(859-873) 당 의종 이최
(873-888) 당 희종 이현 황소의 난 시작. 880년 동도 낙양 함락. 이후 장안까지 진격. 희종의 반격으로 황소의 난 실패로 돌아감.
(888-904) 당 소종 이엽
(904-907) 당 애제 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