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 220년
조조(曹操)가 사망하자 조비(曹丕)가 위를 이어받아 승상 위왕에 올랐다. 연호를 건안(建安) 25년에서 개원하여 연강 원년(延康元年)으로 바꾸었다. 10월, 헌제는 어사대부 장음(張音)에게 조서를 들게 하고, 옥새를 받들어 조비에게 제위를 선양하며 말했다.
“짐이 재위한지 삼십년 동안 천하가 흔들리고 뒤집혔으나 다행히 조종(祖宗)의 혼령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 다시 존립했소. 그러나 이제 천상(天象)을 우러르고 민심을 굽어 살피니 화정(炎精)의 기수 이미 끝나고 행운(行運)이 조씨에게 있소. 이에 전왕(前王: 조조)은 이미 신무 (神武)의 공을 세우고 금왕(今王: 조비)도 명덕을 비춰 그 기대에 응했소. 역수(曆數)가 이렇게 분명하니 믿어 알 수 있소. 무릇 대도지행(大道之行: 대도가 행해짐)이면 천하위공(天下為公: 천하를 모두 향유하게 됨)이라 했소. 당요(唐堯: 요임금)는 아들을 위해서 삿되지 아니해 이름을 무궁히 전하소. 짐도 남몰래 이를 우러러 본받고자 했소. 이제 마땅히 요임금의 모범을 따라 승상 위왕에게 선위하니 위왕은 사양치 마시오!"
조비는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여러 번 권한 후 10월 28일에 비로소 번양(翻揚)에 제단을 세워 관위에 따라 백관을 배석시키고 제위에 올랐다. 연호를 연강에서 황초(黃初)로 바꾸고 전국적으로 대사면령을 내렸다. 위문제(魏文帝-조비)는 황초 원년(220) 11월 1일 헌제 유협에게 1만 호의 식읍을 주고 산양공(山陽公)으로 봉하였다.-조부인 태왕 조숭(曹嵩)을 태황제(太皇帝)라고 하였으며, 부친 무왕에게 무황제(武黃帝)의 칭호를 바쳤다.
- 221년
6월, 조비는 부인 견씨가 자신에 대한 총애가 줄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원망하자 견씨를 죽이고 업에 매장한다. 8월, 손권이 몸소 번국이 되기를 청하자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오왕으로 봉하였다. 조비는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우금이 돌아오자, 그를 위로하며 안원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우금이 참배하러 간 조조의 묘에 자신이 수치스럽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려놓게 하였다. 우금은 그것을 보고 화병으로 앓다가 죽었다.
- 226년
5월, 조비가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병을 얻었고,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다. 위문제는 조진, 진군, 조휴, 사마의 등으로 하여금 조예를 보필하게 하고, 17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6월, 조예는 조비의 손에 죽은 견씨에게 문소황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 견씨의 친족들을 중용하는 등 어머니의 죽음을 늘 신경 쓰며 살았다. 8월, 손권이 강하를 공격하지만, 태수인 문빙이 굳건히 지켰다. 조정에서 구원군을 보낼 것을 건의하지만, 조예는“손권은 수전에 익숙한데, 감히 배에서 내려 뭍에서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엄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지금은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공격이란 수비하는 세력보다 두 배는 있어야 하므로,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라 하였고, 이내 손권은 퇴각하였다. 또한 제갈근이 양양을 공격하였으나 사마의가 이를 격파하였다.
- 228년
220년, 촉장이었던 맹달은 유장을 배신하고 유비에게 귀순하였으나, 조비가 제위에 올랐을 때 다시 위에 투항하고, 재주가 뛰어나 조비의 총애를 받았다. 사마의는 그러한 그를 신임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맹달은 신성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26년 조비가 사망하자 그의 위치는 불안해졌고, 이에 227년에 제갈량이 평소 맹달을 미워하던 신의에게 곽모를 거짓 투항시켜 위나라와 맹달의 사이를 이간함으로써 요지인 상용을 지키고 있는 그가 촉으로 다시 귀순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사마의는 맹달에게 그를 신임한다는 전언을 보냄으로써 그를 안심시키고, 신속하게 진군하여 방심하고 있는 맹달을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아 참수한다.
4월, 위나라는 오 토벌군을 일으켜 강릉과 심양에 각각 사마의와 조휴를 주둔시킨다. 조휴는 오의 파양태수 주방의 거짓 투항에 속아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육손과 주방의 군대에 참패하고 석정으로 후퇴한다. 가규가 급히 와서 조휴를 구원했음에도, 조휴는 평소 사이가 나빴던 가규를 모함한다. 조휴는 이 일로 인해 등에 악성 종기가 생겨 죽었다.
- 230년
대장군 조진은 촉을 토벌할 것을 건의하였고, 조예가 이를 승낙하였다. 8월, 대사마 조진과 대장군 사마의는 조예의 조칙을 받아, 조진은 자오곡에서 남쪽을 향해 진군하였고, 사마의는 한수를 따라 서성을 통하여 한중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9월, 폭우가 계속되어 이수, 낙수, 황하, 한수 등이 범람하여 잔도가 끊어지자 조진 등은 퇴각하였다.
- 231년
제갈량이 또다시 군사를 보내 기산을 포위하자, 병든 조진 대신에 사마의가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지휘하여 출진한다. 사마의는 비요로 하여금 상규를 지키게 하고 기산을 구원하였다. 곽회와 비요는 제갈량에게 패퇴하였고, 사마의는 영채를 지어 방비를 굳힌 채 출진하지 않았다. 장합은 사마의에게 "저들이 멀리서 와서 우리와 맞서는데 싸우기를 청하여도 공께 허락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저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 여기시고, 장구(長久)한 계책으로 저들을 제압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물며[且] 기산의 백성은 우리의 대군(大軍)이 근처에 있음을 알고 사람마다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이 절로 굳세게 되었을 것이니 이곳에 잠시 주둔하였다가 군사를 나누어 기병(奇兵)으로 삼아 제갈량의 후방을 칠 것처럼 보이시면 제갈량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감히 기산을 더 이상 핍박치도 못할 터이니, 이대로 주저앉아 민망(民望)을 잃지 마소서. 제갈량은 현군(縣軍-후방의 지원이 없는 군대)으로 군량이 적으니 역시 얼마 안 있어 떠나갈 것입니다." 하며, 제갈량을 기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마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제장들이 사마의가 촉을 겁내는 것이라 여기자, 사마의는 한스러워하며 5월에 군사를 출진시키지만 위연, 고상, 오반 등에게 패배한 후 다시 방어를 굳혀 출진하지 않는다. 제갈량이 군량이 떨어져 퇴각하려 하자 장합에게 제갈량을 추적할 것을 요구한다. 장합이 말하길, “군법(軍法-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하였으나, 제갈량의 복병에 의해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고 죽는다.
- 234년
3월, 산양공 유협이 세상을 떠나니, 명제는 유협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4월, 제갈량이 10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위남에 영루를 세우니, 조예는 진랑에게 보병과 기병 2만을 주어 사마의를 돕도록 하였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도발하기 위해 사마의에게 자주 사자를 보내 편지를 전하고, 건괵(여성이 쓰던 두건과 머리장식)을 보냈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과 싸우기를 원했으나, 조예는 “단지 성벽을 굳게 지켜 촉나라 군대의 날카로운 기운을 꺾음으로 그들로 하여금 나아가 공격할 수 없게 하고, 물러나 싸울 수 없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 군량미가 부족할 것이다. 설령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해도 얻는 것이 없다면 반드시 군대를 물릴 것이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할 때는 아군을 안전한 상태에 놓고 오랜 시일 동안 피곤해진 적군을 공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어야 한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에 또 제갈량이 싸움을 걸자 사마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출전하려 하였지만, 명제가 신비로 하여금 부절을 지니고 막아서게 하니, 사마의는 결국 싸우러 나가지 못하였다. 8월, 병이 깊어진 제갈량이 병사했고, 촉의 군대는 물러갔다. 사마의는 촉의 군대가 후퇴한 진영을 살펴본 뒤, “천하의 기재로다.” 라며 감탄하였다. 신비가 아직 제갈량이 죽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자 사마의는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서(軍書), 밀계(密計), 병마(兵馬-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糧穀)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오장(五藏)을-오장에서 五는 숫자 5라기 보다는 중요한 것을 나타내는 의미 정도로 쓰인 것이다-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라며 촉군의 후미를 추격했다. 그러나 촉군이 갑자기 뒤돌아서 공격해오는 듯 하자 사마의는 놀라서 군대를 퇴각시켰다. 이에 백성들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死諸葛走生仲達) 고 하였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사마의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헤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