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분기
서론
왜 서구가 역사의 주도권으로 부상했을까에 대한 의문점은 항상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서구는 18세기 이전만 해도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주도권을 영국을 기점으로 하는 서구 열강들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위도와 경도 그리고 0시는 당연히 영국을 기준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수많은 국제 표준들, 그리고 최초라는 수식은 서구의 몫이 되어져 갔다. 아시아 문화권은 1800년까지만 해도 훨씬 우월한 문명을 자랑했다. 문화, 과학 등 어떠한 면도 유럽의 어떠한 나라보다 동양은 그 문화적 우수성을 뒤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청나라의 경우, 1인당 국민소득을 놓고 따지면 서유럽을 앞섰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구수를 살펴봐도 청나라는 당시 약 3억 8100만 명이었고, 서유럽은 1억 6900만 명 정도 밖에 되질 않았다.
다시 첫 물음으로 되돌아 가면, 왜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서 세상의 주도권을 산업화의 선두로 올라갈 수 있었는가, 왜 그전까지 어떠한 면에서도 뒤떨어지지 않았던 청나라, 혹은 서구 열강의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이 아니었을까에 대해서 조명하고자 한다. 중국의 산업혁명이 서구의 그것과 어떠한 식으로 다르게 진행되었고, 왜 산업혁명이 늦었고 산업화가 진행되는 것도 실패적이었던 것에 관해서 유럽과의 차이점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특성들의 학술적인 근거를 ‘대분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유럽중심주의 이후에 중국 내적 요인에 의한 산업화의 진행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세계GDP에서 아시아의 비중이 1820년의 60%에서 1913년의 25%로 축소되는 동안 구미의 비중은 25%에서 55%로 확대된다. 이와 함께 서양과 비서양의 소득격차도 비가역적으로 확대되는데, 1820년에 “겨우” 2배였던 비율은 1세기 후 4.5배, 또 1세기 후에는 (20세기 말 동아시아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5.6배에 이른다.
영국의 산업혁명의 과정과 원인
중국은 유럽 이전에 이미 세 가지의 혁신적 발명품을 먼저 선보였다. 화약, 나침반, 인쇄술 그러한 것을 먼저 발견한 중국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황이 18세기와 19세기에 들어서 역전이 된다는 것은 이 이외의 요소가 영국의 산업혁명을 도모하였고, 도약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의 순서를 살펴보자면 이러한 배경과 과정의 순서를 살펴보자면 이런 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a. 영국에서 발생한 배경
- 정치적 안정(명예혁명) - 모직물공업발달 - 자본축적 - 인클로져 운동으로 노동력 풍부 - 석탄풍부 - 교통발달
b. 과정
- 면직물에 대한 수요증가 → 방적기, 방직기 발명 → 산업혁명(동력장치 : 와트의 증기기관) →교통, 통신발달
- 증기선(풀턴), 증기기관차(스티븐슨), 유선전신(모스), 무선전신(마르코니), 전화(벨)
- 국제화, 교역증가, 시장확대
궁극적으로 → 전기, 화학발달
c. 전파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결과는 주변 국가 그리고 다른 대륙까지에 파급되기에 이른다. 최초에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영국의 식민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로 파급되었고, 그 이후에는 러시아, 일본으로 파급되었다.
즉 영국 -> 프랑스, 독일, 미국 -> 러시아, 일본의 순을 띄고 있다.
d. 결과
- 공장제 수공업 → 공장기계공업 - 농업사회 → 산업사회 - 자본주의 - 도시문제 - 노동문제 - 사회주의
그 결과 이러한 모습의 사회로 전 세계적 파급효과를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산업혁명을 주도하게 된 원동력으로는 제도주의, 문화주의 등 여러 가지 근본을 학자들은 들어가고 있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는 '제도주의'가 첫 번째로 언급이 되는데, '노스'는 17세기의 영국의 제도변화에 주목하여 산업혁명을 설명하였는데, 1688년 명예혁명을 계기로 의회, 법원이 왕권을 통제하는 권력분립이 수립됨에 따라 재산몰수 같은 국왕의 자이적 침해행위가 제약되는 동시에 개인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제도기반이 구축되었다. 그 결과 시장에서의 '거래비용'이 축소되고 경제활동의 ‘인센티브’가 형성되면서 산업혁명의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애스모글루'가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였는데, 1) 소수 엘리트를 위한 ‘착취적’(extractive) 정치제도가 다수 국민의 인센티브를 억압하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통해 빈곤·저발전을 초래하는 반면 2) 사회 전반에 정치권력을 분산하는 ‘포용적’(inclusive) 정치제도는 만인의 소유권,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통해 번영·성장을 낳는다고 주장한다.명예혁명으로 왕권은 제한되었고 경제 제도를 결정할 권력이 의회에 귀속되었다. 정부는 투자, 무역, 혁신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들을 채택했다. 그것은 확고부동하게 소유권을 강제했는데, 여기에는 아이디어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하는 특허권도 포함되어 혁신을 자극했다.반면 유럽대륙의 프랑스나 스페인, 나아가 아시아의 중국은 영국 명예혁명에 필적하는 정치혁명에 실패했기 때문에 산업혁명을 향한 경쟁에서도 뒤쳐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학파의 연구는 영국 산업혁명의 원인에 대한 기존의 제도적 설명을 축소, 심지어 최소화하면서 강력한 ‘반(反)제도주의적’ 함의를 띤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동·서양의 격차가 확대된 것은 맞지만, 그것의 발생 원인을 서양·영국의 제도적 우위에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의 성공을 과거에 회고적으로 투사한 목적론적 접근일 수도 있다는 비판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소유권의 신화’인데, 최근에 홉핏(Hoppit, 2011)이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역사적 상식과 달리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소유권은 그리 안전하지 않았으며, 과중한 세금, 빈번한 수용, 정부의 일방적 재설정에 종종 직면했다는 것이다. 결국 노스·애스모글루가 격찬한 17세기 영국의 ‘안전한(secure) 소유권’이란 여러모로 허구적이며, 당대 영국의 제도적 현실을 특징짓는 것은 오히려 소유권의 ‘불안전성’(insecurity)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영국의 제도는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았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영국은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2) 영국의 좋은 제도가 산업혁 명 과정에서 얼마간 선기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적절하 게 불안전한” 소유권이었다. 동시대의 프랑스가 농촌의 “안전한 소유권”에 개입하지 못해 곤란을 겪은 반면, 영국은 기존의 소유권을 효과적으로 “침해”하면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토지소유권의 정리(인클로저)를 촉진했다(Allen, 2009a: 5). 어떤 식의 결론으로 나아가든, 기존의 제도적 해석은 근본적인 진퇴양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랜즈(Landes, 2009)처럼 문화적 해석을 제도적 해석에 우선시하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그는 산업혁명을 낳은 영국인들의 “성공의 자질”을“연구와 개발,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진취적 정신" 같은 문화적요인에서 찾은 후, 노스·애스모글루가 주목했던 일련의 제도까지도 그러한 문화적 우위의 산물로 본다. 애스모글루가 제도를 문화의 원인으로 간주한다면 랜즈는 그 인과관계를 역전하는 셈이다. 문화적 해석은 산업혁명의 원동력으로 영국 특유의 ‘기술적 창의성’ 등을 강조하지만, 유럽적 차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영국의 문화적 우위는 그리 현저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영국의 산업혁명을 야기했던 기술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기술에서 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영국은 유럽에서 발명가적 사회는 아니었다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산업혁명의 역군이라고 할 수 있는 증기기관 조차 영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발명하는 데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타국의 발명품을 가지고 수익성있는 사업 모델을 발견하는 '기업가적 수완성'은 영국의 문화적 덕목이 산업혁명을 이끌 수 있었다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문화적 담론도 최근에는 그 범주를 확장해서 유럽 차원의 특성에서 찾아볼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범유라시아적 차원으로 확장을 하여 찾아보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도 캘리포니아학파는 큰 역할을 하는데, 이들 연구는 앞절에서 소개한 대로 ‘반(反)제도주의적’인 동시에 같은 맥락에서 ‘반(反)문화주의적’이다.
- 경제적 해석 - 앨런의 산업혁명론
제도·문화적 해석이 근본적인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일부는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의 고유한 메커니즘에 착안하여 산업혁명의 계기를 설명하고자 했다. 특히 2000년대 중후반에 앨런(R. Allen)이 제시한 산업혁명론은 전세계 학계에서 그 의의를 인정받아 현재 급속도로 통용되는 중이다. 그는 일련의 제도·문화가 구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의 ‘경제적’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일국의 산업혁명은 결코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어떤 선진적인 제도나 문화를 통해 일국 기술혁신의 ‘공급’을 증가시킬 수는있다. 하지만 이는 기술혁신의 ‘수요’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그가 볼 때 기술혁신의 공급에서 당대 영국과 유럽대륙·아시아는 거의 동등했다. 결국 영국을 타지역과 구분한 것은 기술혁신의 수요였다는 것이다. 유럽대륙과 아시아가 영국의 기술을 수입하는 데 그토록 더디었던 원인은 제도·문화적 우열이 아니라 기술혁신의 ‘수익성’(profitability)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산업혁명 시기의 발명들은 영국의 고임금·저가에너지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것이 앨런의 분석이다. 이것들은 노동을 자본·에너지로 대체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이러한 영국의 고임금·저가에너지가 형성되어진 원인에는 두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유럽적 차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영국은 양모공업에서 기존의 선도국인 이탈리아를 제치고 유럽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두 번째는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세계적 차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영국은 식민지 개척, 중상주의를 통해 스페인·포르투갈을 제치고 아메리카·인도를 포함한 대륙간 무역망을 지배하게 된다. 이 단계들을 거쳐서 영국은 급속한 도시 경제의 발전을 이루었고, 런던은 해상교역의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앨런은 최근의 포메란츠 를 중점으로 하는 캘리포니아 학파의 석탄에 대한 대분기적 내용과는 반대로 영국의 석탄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는 순수한 ‘자연적 선물’ 또는 ‘지리적 행운’은 아니었다고 강조하는데, 중상주의 → 도시화로서의 경제구조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영국은 장기간에 걸친 에너지대체, ‘무기경제’로의 이행을 감수하지 않은 채 ‘유기경제’(목재·목탄) 안에 머물렀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석탄은 ‘자연적’ 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었다고 그는 결론 내린다
하지만 앨런의 말처럼 18세기 말, 19세기 초중반에 어떤 중요한 ‘자본절약적’ 기술진보가 실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앨런의 가설처럼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앨런은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는) ‘발명’ 단계와 (자본생산성이 상승하는) ‘개선’ 단계를 구분하는데, 차라리 마르크스주의경제학처럼 (자본생산성의 하락이 일시적으로 상쇄·반전되는) ‘성장기’와(자본생산성의 하락이 재개되는) ‘불황기’를 구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앨런이 ‘개선’ 단계의 특징으로 부각시키는 일련의 자본절약적 기술진보는 19세기 영국경제의 ‘성장기’를 견인한 역사적 반작용요인의 효과로도 충분히 재해석될 수 있다.
중국의 정체(停滯)
“산업혁명은 왜 영국에서 시작되었나”라는 문제점이 유럽사적인 측면에서 세계사적인 측면으로 넘어오게 된 경우를 알 수 있었다. 제도·문화적인 해석과 경제적 해석은 그러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접근법을 보여주었지만, 각각 그 한계를 엿보였다. 하지만 앨런이 제시한 경제적 접근법에서 유럽사적 소분기 문제를 세계사적 대분기로 확대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고, 그것을 토대로 대분기를 고찰하려고 한다.
1973년에 엘빈은 14세기 초의 '왕정농서(王禎農書)'에 나오는 수력방적기인데, 노동절약적 효과가 상당하여 인력이 부족한 북중국(화북)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그런데 엘빈에 따르면 이는 18세기 프랑스 '백과전서'의 방적기와 너무나 흡사하여 “이 기술의 궁극적 기원이 중국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정도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노동절약적 기술진보 노선을 조금만 더 추구했다면 중국은 서양보다 4백 년 전에 산업혁명을 달성했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이러한 시점에서‘대분기’의 저자 케네스 포메란츠는 동아시아와 유럽의 놀라울 만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북서유럽은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중국을 필두로 하는 동아시아는 정체하고 말았을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책을 저술했다. 케네스 포메란츠는 이 두 대륙의 운명을 가른 것은 첫 번째 석탄의 발견, 그리고 두 번째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의 차이라는 것을 근거로 영국이 산업혁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차이를 발견한다. 그 결과 영국경제는 목재·목탄에서 석탄으로 주력에너지원을 대체해 나간다. 도시에서는 벽난로·굴뚝을 갖춘 주택이 보편화되었고, 주요 탄광을 중심으로 채광·운송업이 발전한다.
프랑크도 1998년의 '리오리엔트'에서 엘빈의 관점을 수용하여, 중국과 영국이 19세기에 분기한 원인을 노동가격/비용구조 차이에서 찾는다. 아시아가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경제력을 압도한 동안, 고임금의 유럽은 노동절약적 기계화에 그만큼 절박했다는 것이다.
'대분기'의 저자인 포메란츠의 경우, 2000년 판 '대분기'에서는 엘빈과 프랑크의 분석에 비관적이었지만, 10년 뒤의 대분기에서는 자신의 연구를 자평하면서 앨런의 산업혁명론을 격찬하면서 입장을 변경하고 만다. 포메란츠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학파의 주요 구성원들은 산업혁명론을 대부분 높게 평가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근거는 다음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포메란츠의 2000년 저작에서 내린 결론은, 동·서양이 18세기까지는 ‘경이로운 유사성’을 유지하다가 19세기에 ‘대분기’한 원인을 각 지역의 ‘내적’ 요인에서 찾을 수는 없으므로 결국 식민지·석탄이라는 양대‘외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15) 그런데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는 “인과적 분석을 포기하고 식민지·석탄이라는 우연·행운·횡재적 요소에 의존했다”, “식민지·석탄이 흑조(black swan), 기계신(deux ex machina)처럼 홀연히 등장한다” 식의 비판도 상당했다(Coclanis, 2011).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중후반에 앨런이 제안한 산업혁명론(편향적 기술진보론)은 포메란츠·캘리포니아학파의 결함, 즉 정교한 인과논리의 결여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breakthrough)처럼 인식되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산업혁명의 실패는 실패라는 표현 보다는 명·청 당대의 경제적 조건을 합리적으로 고려하는 과정에서 산업혁명을 단지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결론을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명·청대를 퇴행기로 간주하는 중국사학계의 뿌리 깊은 ‘자본주의맹아론’은 사실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지 질문할 수 있다. 맹아론은 전현대 중국사 안에서 현대적 요소를 식별·추출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정체적 이미지 를 극복하려는 시도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현대 중국사회를 (유산된) 자본주의의 전단계로 어떻게든 재단하려는 강박관념의 산물이다(리보중). 중국은 영토면적에서 유럽과 엇비슷했지만 경지비율은 10%에 불과했고, 그럼에도 세계인구의 20% 이상을 계속 부양했다. 이처럼 “사람은 많고 땅은 좁은”(人多地少) 조건에서 중국농업은 단위면적당 노동투입을 최대화 하는 ‘노동집약적’ 경작을 통해 단위면적당 산출량, 즉 ‘토지생산성’의 최대화를 꾀했다. 또한 쌀은 파종량 대비 수확량에서 유럽의 밀보다 월등했다. 또 관개시설로 공급되는 강수는 지력소모를 최소화했으므로 유럽식 윤작·휴경은 불필요했고, 오히려 1년1작을 넘는 다작이 가능했다. 게다가 쌀은 그 자체로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와 열량을 완비했다. 그리하여 유럽에서는 5인가족 부양에 5-10㏊ 토지가 필요했던 반면 중국에서는 0.5-1㏊로 충분했다. 이러한 중국의 농업은 수·당대까지는 유럽식의 ‘규모의 경제’ 원리가 작동했다고 본다. 하지만 송대부터 강남농업이 화북농업을 추월하면서 중국농업은 결국 상이한 기술진보 경로를 채택했다. 유럽농업과 달리 중국농업은 발전을 거듭할수록 경작단위를 축소했다. 그리고 자본의 투입도 축소하거나 적어도 최소화하는 가운데, 소규모 관개지를 대상으로 한 숙련된 인간노동(精耕細作)의 투입을 증대시켰다(Bray, 2008). 중국인구는 1-1000년간 6천만 명 수준을 유지하다가 1000-1820년간 6.5배로 증가하는데, 참고로 같은 기간에 세계는 3.9배, 서유럽은 5.2배의 인구성장을 기록했다(Maddison, 2007: 376). 그리하여 노동집약적 쌀농사기술(이앙법, 이·삼모작, 관개기술)이 보편화되는 동시에 각종 노동집약적 작물(뽕, 면화, 차,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이 확산되면 될수록, 인구성장이 토지생산성의 상승에 기여하고 또한 이것이 인구성장을 재촉진하는 선순환구조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엘빈은 이러한 인구 증가와 노동생산성이 오른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엘빈은 명·청대에 토지생산성이 생태학적 상한에 도달한 반면, 과잉인구로 인해 단위노동당 수확체감이 가속화되면서 노동생산성은 하락했다고 봤다. 황종지 등은 과밀(過密, involution) 개념을 중국농업에 적용하여 같은 결론을 도출했는데, 여기서 과밀이란 곧 ‘과도한 집약’이다. 결국 이들이 볼 때, 노동생산성의 하락은 노동집약적 농법으로 토지생산성을 최대화한 데 따르는 준필연적 대가다. 즉 인구는 늘어났지만, 그러한 노동력의 증가로 인해 오히려 농업에 대한 기술 집약적 개발이 적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노동생산성이 상승하지 않았다면 결국 ‘발전’(development)이 아닌 ‘정체’(stagnation)이므로, “비자본주의적 기술진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음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노동생산성의 지속적 상승이라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다. 심지어 자본(역축·농기구)의 비중이 컸던 유럽 농업에서도 노동의 절약은 쉽지 않았고, 영국·네덜란드를 제외하면 16-18세기 동안 노동생산성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 최근의 세계사적 비교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초의 강남농업은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농업혁명’을 선도했다는) 영국·네덜란드농업과 노동생산성에서 비등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중국농업의 노동생산성이 장기적으로 불변했거나 심지어 약간 하락했다 하더라도 이 대목에서는 ‘정체’보다는 오히려 장기에 걸친 ‘안정성’(stability)에 주목해야 한다.
대분기
포메란츠는 유라시아 대륙 양단에 위치한 영국과 양쯔강 하류 지역(상하이시로 이어지는 양쯔강 삼각주 지역)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두 지역은 그의 표현대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세계’였다. 포메란츠는 모든 사회•경제적 발전 지표를 찾아나섰다. 그 과정에서 양 지역이 단순히 대등한 정도를 넘어,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인구밀도, 기대수명, 생활수준, 소비방식, 농업의 상업화 정도, 원형산업화(Pro-industrialㆍ본격적 산업화 이전 수공업 형태의 산업화를 의미) 활동 등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보였다. 그뿐 아니라 영국보다 중국이 토지, 노동, 상품 거래에 대한 규제를 심하게 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음을 발견했다(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였다). 결론적으로, 1800년 이전 “축적된 자본이든 경제제도이든 간에, 유럽 경제가 다른 지역보다 산업화에 유리한 결정적 조건을 누리고 있었다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결코 예비된 운명이 아니었다. 모든 정황과 기준을 근거로 분석해볼 때, 훗날 두 중핵지역의 운명이 서로 판이하게 갈리게 되리라는 사실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유사점도 있다. 두 지역 모두 동일한 종류의 환경적 제약을 겪었다는 것이다. 포메란츠는 맬서스가 말한 ‘생활에 필요한 네 가지 기본적 수요’, 즉 음식•연료•섬유•건축재에 대해 면밀히 연구했는데, 이는 모두 한정된 토지를 두고 서로 각축을 벌일 수밖에 없는 수요들이었다. 포메란츠의 연구에 따르면, 앞선 두 중핵지역은 당시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산림자원의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18세기 유럽이나 중국 모두에서 목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1인당 에너지 소비 확대에 제동이 걸렸다. 산림자원이 한정됐다는 것은 인구가 조금만 증가해도 토지에 대한 압력이 상승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구 증가로 재배지를 확대해야 하는 경우 (비료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토질이 황폐화할 우려가 심각했다. 포메란츠는 당시 기술 수준에서 토지 이용을 집약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심각한 환경 훼손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환경적 난관’(Ecological Impasse)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8세기까지 세계 최강국이라고 일컬어지던 청나라가 정체되어버린 이유는 위 ‘석탄과 식민지’밖에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있다.
대분기론의 반박, 오리엔탈리즘
“산업혁명은 왜 영국에서 시작되었나”
포메란츠로 대표되는 캘리포니아 학파의 대분기론을 반박하고 나서는 것은 중국, 즉 청나라 고유의 속성들과 과정에 대해서 주목하자는 의견들이다. 산업혁명은 영국의 맥락에서 일어났었던 고유의 사건일 뿐이고, 대분기론에서 미처 심도 있게 다루지 못했었던 다른 종속적인 사건들과 청나라의 특성에 맞춰서 중국의 산업화가 늦어진 이유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알렌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도 그들의 연구 결과에서 산업혁명 이전에 양쯔강 델타가 영국과 발전 속도에서 동일한 위상에 있었다는 견해를 반박하였다. 랜디스나, 반 잔댄 등이 이에 동조하지만 결국 서구 유럽중심주의를 기초로 한 오리엔탈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포메란츠에 반대하며 나왔던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서구유럽은 이미 16세기부터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나섰고, 자국에 없는 자원과 노동력 등을 이를 통해 해결했다. 이는 상인계층의 힘을 자연스럽게 증대시켜 이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사회적으로 목소리기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나 공화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반면 중국의 상인계급은 철저하게 지배층 밑에 존재했다. 아무리 대상인이라고 할지라도 관료계급보다 위에 군림할 수는 없었다. 이는 우리와 일본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농공상으로 분류되는 계급사회에서 상인이 가장 하위층을 점하는 것은 당시 아시아 국가들의 상업과 상인에 대한 의식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또한 중국은 식민지 건설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명나라 때 정화를 보내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긴 했지만, 서구유럽과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중국의 역대 왕조를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신하국이 ‘조공’을 보내면 이에 화답하는 수준이었지, 서구유럽의 수탈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약하자면, 중국은 기본적으로 대륙인지라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많은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도 가내수공업 자급자족 문화 그리고 유럽과 비교했을 때 터무니없이 싼 인건비를 가지고 있었다.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택해서 ‘발전’보다는 ‘체제유지’에 더욱 큰 의미를 두었다. 랜디스는 외부의 기술에 대한 거부로 중국 자체가 오랫동안 기술적‧과학적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본다. 새로운 것을 열렬히 좋아하는 유럽인들과 달리, 중국인들은 “가장 완벽한 근대의 물건보다도 가장 결함이 많은 고대 유물을 더 좋아한다”고 보았다 (Landes 1999). 반면 서구유럽은 자국의 부족한 자원과 시장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산업과 기계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1800년대가 되면 서구유럽의 국력이 아시아를 능가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이 주장했던 것의 한계도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벗어나서, 보다 풍요롭게 살고자 했던 서구유럽의 ‘욕망’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보다 발전하게 만든 중요한 이유라고 여겼던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론
영국은 영국, 중국은 중국
유럽의 근대성에 관한 포므란츠의 인식론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포므란츠의 논지는 한 마디로 유럽이 근대성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우연’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영국이 석탄 자원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었고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얻어 그 자원을 국가의 부를 위해 가용할 수 있게 된것을 ‘횡재’(windfall),‘우연’(accidents) ‘행운’(luck) ‘운’(fortune)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사한 표현은 홉슨, 프랑크의 저술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화를 우연으로 여기는 포므란츠의 주장은 한계가 있다.그 이유는 가령 중국이 석탄과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잉글랜드 보다 먼저 산업화할 수 없었으며, 그 핵심 이유는 중국이 기술과 기술력 제고 능력이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제구조면에서 18세기에 여전히 중국에는 어떤 다른 선택을 강제하는 유인이나 압박 혹은 정치경제적 동력이 없었다. 그 결과 중국은 유럽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끝으로 우리는 월러스틴이 밝혔듯이,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는 역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몇몇 대분기론자들의 반유럽중심주의 시각이 방법론적 내지 인식론적 중요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유럽중심주의를 강화시키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서구학자들까지도 무의식중에 유럽중심적 시각의 이데올로기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자료
- 케네스 포메란츠, 『대분기』, 서울: 에코리브르, 2016.
- 마틴 자크,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서울: 부키, 2010.
- 김두진, 이내영, 『유럽산업혁명과 동아시아 ‘대분기’ 논쟁』, 『아세아연구 제55권 2호』, 2012
- 안종석,『영국 산업혁명의 원인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대분기’의 재고찰』, 『사회와역사』, 103, 349-399, 2014
- 안드레 군더 프랑크, 이희재 역, 『리오리엔트』, 서울:이산,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