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아편이란
아편은 양귀비로 만들어지는 마약의 일종이다. 마취제 또는 이질이나 설사의 치료에 쓰이며, 모르핀이나 코데인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아편은 크게 3가지로 생아편, 의약용 아편, 흡연용 아편으로 나눌 수 있다.
생아편은 양귀비 열매에 상처를 내고 흘러나오는 액을 건조시켜 덩어리로 만든 것을 말하고, 의약용 아편은 생아편을 가루로 만들어 의약용으로 쓰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마약’으로 생각하는 흡연용 아편은 생아편을 물에 녹여 증발시키고 농축해 아편 엑기스로 만든 것으로 곰방대를 사용해 흡연하거나, 액체를 직접 주사하기도 합니다. 아편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마약류가 그렇듯이 ‘중독’ 때문이다. 마약인 아편은 습관성이 되고, 만성중독증을 앓게 하기 때문에 점차 다량을 사용하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점점 다량의 아편을 원하게 되고, 종국에는 생활이 피폐해지며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아편전쟁 배경 요약
황제 통치 하의 청나라는 아직 중세시대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눈에 서양은 미개한 나라로 비치고 있었다. 청나라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 밖을 보지 못할 때, 영국에는 기계를 갖춘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으며, 산업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국력이 막강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이러한 발전상이나 국력에 대해 청은 잘 알지 못했다. 산업혁명으로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된 영국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었고 인도마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영국은 중국에도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청나라는 통상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서양 강대국을 거절하다 '광동' 한 곳만을 무역하는 곳으로 지정해 두었다. 당시의 무역 현황을 살펴보면,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하여 갔으나, 중국인들은 "미개한 나라 물건은 구입할게 없다." 라며 영국 제품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영국이 지속적으로 대중 무역 적자를 보게 만들었다.
당시의 영국은 차를 마시는 문화가 지배적으로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는 양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은 차를 수출하는 대가로 은(당대의 화폐)만을 징수했다. 이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은을 중국에 지불해야만 했고, 이는 심각한 무역 불균형 을 초래한다.
1차 아편전쟁의 전개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 · 옹정 · 건륭제의 통치기, 이른바 3대의 황금기는 끝났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중국 국민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 무렵 약 1,000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만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서부터 떠도는 유민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이 되면 쉽게 끊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여러 차례 금지령을 내렸으나 통하지 않았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의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선택했다. 플래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동인도회사가 인도의 벵갈 지방(방글라데시와 그 남쪽)에서 아편을 재배해 상인을 통해 중국 근해로 운반한 다음 몰래 중국에 파는 방법을 썼는데(삼각 무역) 1829년 말부터 쾌속 범선이 등장하여 항해시간이 짧아지면서 더 많은 아편을 밀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도광제는 임칙서를 특사(흠차대신)로 파견하여 광주의 아편거래를 막게 했다. 1839년 정월, 광주에 도착한 임칙서는 상황을 주의깊게 살핀 다음 과감하게 손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에게 남은 아편을 관청에 넘기고 다시는 아편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고시했다. 외국인들은 이 조처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른 관리들처럼 뇌물로 매수하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한 달 후 임칙서는 바로 군대를 동원해 13행을 포위하며 행동을 개시했다. 광주에는 자기 나라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통상 감독 엘리어트(찰스)가 군함 2척을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엘리어트는 교묘하게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하였다. 영국 상인들의 아편이 대영제국의 아편으로 둔갑했다. 그는 2만 80상자의 아편을 내놓았다. 도광제는 승리에 흥분했고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가 아직도 더 많은 뇌물을 위해 흥정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임칙서는 호문에서 아편을 불태웠다.
청나라의 강경한 아편무역 금지조치에 대해 영국의 자본가들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당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당의 양당에 의한 의회정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무렵 영국 정부를 이끌었던 휘그당의 파머스턴 내각은 중국무역을 안정된 기초 위에 두는 데 필요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20척의 함선과 4,000여 명의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영국 의회는 토리당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를 승인하였다. 영국 의회는 결국 자본의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마침내 전권대사 엘리어트(조지)는 1840년 6월 육해군 약 4,000여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광동 앞바다에 도착했다. 인도 정부가 영국을 대표하여 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대포와 강한 해군을 갖춘 영국군 앞에 중국의 군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재래식 범선이 대부분이었고 군사 장비는 240여 년 전에 주조된 낡은 것이었다.
영국은 주산 군도를 점령하여 양자강 하구를 봉쇄하고 천진(톈진) 인근까지 함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위협하면서 타협을 시도했다. 천진에서 교섭을 책임지고 있던 직례총독 기선은 오랑캐를 다독인다면서 일단 영국군을 무마하여 광동으로 돌려보냈다. 임칙서가 파면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기선은 광동에 도착하자 영국군의 힘을 깨달았다. 12월 영국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기선은 엘리어트와 개인적으로 배상금 600만 냥의 지급 · 홍콩 할양 · 평등 대우 등을 조건으로 한 기초협약인 '광동협정'을 맺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크게 노한 도광제는 기선을 파면하고 체포하였다.
1841년 가을, 전쟁이 재개되어 영국군이 영파를 점거했다. 이제 영국군의 병력은 1만으로 불어나 있었고, 증기선 14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강구와 주산에서 중국군이 용감하게 저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한편 정부의 무능과 굴욕적인 태도는 중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중국인들은 곳곳에서 침략적인 외국인들에 대항하는 자위조직을 결성하였다. 농민군이 영국군을 포위 공격하여 영국군 사상자가 생긴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1842년 6월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난징)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타협을 할 수밖에는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1842년 8월 영국함대의 갑판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남경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편전쟁의 역사적 의의
난징조약은 막대한 배상금 지불과 공해제 무역의 폐지, 꽝뚱·상하이·닝포·푸조우·샤면의 개방, 홍콩 할양, 관세율 설정을 규정한 것이었고, 다음해에는 추가로 호문조약이 맺어져 최혜국 대우, 영사재판권, 5항의 군함출입의 자유 등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런 형세를 관망하던 미국과 프랑스도 청에 강요하여 1844년 각각 망하조약과 '황포조약'을 맺었다. 난징조약은 중국이 유럽세력에 굴복한 첫걸음인 동시에 중화사상의 붕괴를 가져왔다. 또 중국은 이것을 계기로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에 휩쓸려들어감으로써 중국의 상품시장화와 원료공급지화가 시작되어 봉건사회가 근본적으로 동요하면서 반식민지화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청이 유럽 세력앞에 속수무책일 때 꽝뚱 주변의 중국 민중은 스스로 무장하여 영국군에 항전하였다. 이것이 삼원리 사건으로 비록 본격적인 민중운동이 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유럽세력에 대한 민중의 항전과 자각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