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
황소의 일생
당나라 말기 주조의 원주사람으로 농민반란의 지도자로, 본래 소금을 팔았는데, 책을 읽어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5살 때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희종(僖宗) 건부(乾符) 2년(875) 왕선지(王仙芝)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도 무리를 모아 호응했다. 5년(878) 왕선지가 전사하자 전군을 통솔하면서 스스로를 충천대장군이라 하면서 왕패로 건원했다. 중원과 강남 등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전투를 벌였다.
그는 낙양과 동관을 함락하고 장안에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대제, 연호를 금통이라 했다. 장안을 점령할 정도로 큰 세력을 가진 황소였으나 경제적 기반이 전무했고, 장안 근교 밖에 실질적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이후 피신한 당나라의 반격과, 부장인 주전충의 배신으로 장안에서 도망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하자 다음 해 태산(泰山) 낭호곡(狼虎谷)까지 쫓겼는데, 항복하지 않고 자결했다. 그가 당시의 현실을 비유하면서 지었다는 두 편의 국화시가 유명하다. “스산하게 부는 가을바람 타고 뜰 가득 피었는데, 꽃술도 차고 향기도 식어 나비도 오기 어렵구나. 언젠가 내가 봄을 다스리는 신이 된다면, 복숭아꽃과 함께 같은 곳에 피게 하리라.(颯颯西風滿院裁 蕊寒香冷蝶難來 他年我若爲靑帝 報與桃花一處開)” / “기다려라 가을이 와서 중양절이 가까워지면, 내 꽃은 활짝 피고 온갖 꽃들은 다 시들리라. 하늘 가득 국화 향기가 장안을 뒤덮으리니, 성안은 온통 황금 갑옷을 두르겠네.(待到秋來九月八 我花開後百花殺 沖天香陣透長安 滿城盡帶黃金甲)”
황소의 난은 성과를 맺지 못하고 끝났으나 당나라의 실권은 갈기갈기 찢겨 절도사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사실 안사의 난 이후에도 위태로이 국가를 운영하던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통해 완벽한 무능함을 보여주면서 절도사들의 군신관계를 해제시켰고, 환관의 정치와 각지의 절도사들의 난이 겹치면서 썩어가던 당나라가 직접적 멸망의 길을 걷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