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록산
출생
출생한 해는 703년이 유력하며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란계 소그드인의 무장이었던 안연언(安延偃:)이고, 어머니는 터키족 돌궐(突厥)의 무녀(巫女) 아사덕씨(阿史德氏)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어머니가 돌궐족의 장수와 재혼하였다. 안(安)이라는 성씨는 계부의 성(姓)이며 자식이 없었던 계부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사건
그는 6개국어를 구사하였다. 그래서 젊었을 때 영주(營州)에서 호시아랑(互市牙朗) 역할을 하였다. 30대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를 섬겨 무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742년에 영주에 본거를 두는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로 발탁되었다. 해(奚)·거란(契丹)·실위(室韋)·말갈(靺鞨) 등 동북지방의 여러 민족의 칩입을 방어하고 위무(慰撫)에 노력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사자(使者)를 뇌물로 농락하는 일에 능하였기 때문에 변경의 방비에 번장(蕃將)이 중용되는 시류를 타고 급속히 현종(玄宗)의 신임을 얻었다. 안녹산은 거구의 몸집을 가진 체형이었는데 현종이 그의 불룩한 배를 가리켜 '무엇이 들어 있나?' 하고 농담으로 묻자, '오직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차 있다'고 즉각 대답하였다든가, 양귀비의 환심을 사서 그의 양자가 되었다는 등 언변이 능했으며, 전해지는 일화가 많다. 이렇게 하여 744년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 및 751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겸임함으로써 당의 국경방비군 전체의 3분의 l 정도의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황태자와 당시의 총신인 양국충(楊國忠)은 안녹산에게 모반(謀反)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고 현종과 안녹산 사이에 이간을 획책하였다. 이에 안녹산은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기를 들고 755년 11월 1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범양에서 중원(中原)으로 쳐들어갔다.
은해 12월 뤄양[洛陽]을 점령하고 이듬해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성무(聖武)라는 연호를 세웠고 다음해 6월에는 수도 장안을 정복하였으며 화북(華北)지방의 주요부를 모두 점령하였다. 하지만 장안의 점령과 관리를 부하들에게 일임하여 방치하였고 얼마 후 시력이 약해지고, 악성 종기를 앓게 되자 위령(威令)이 서지 않았으며, 또한 애첩의 소생을 편애함으로써 둘째아들인 안경서(安慶緖)와 반목하였다. 결국 경서와 공모한 환관 이저아(李猪兒)에게 취침 중에 살해되었다. 안녹산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사명(史思明)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가 다시 반란군에 가담하였는데 이를 두고 두사람의 이름을 따서 안사(安史)의 난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