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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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fn7101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1일 (화) 22: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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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을 건국한 낭야왕 사마예(317)

팔왕의 난이 한창이던 혜제 영흥(永興) 원년(304)에 당시 황태제(皇太弟)로 있던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은 동안왕(東安王) 사마요(司馬繇)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회의에서 그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동안왕의 조카였던 29세의 젊은 좌장군(左將軍)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는 자신도 위험에 처할까 매우 불안했다. 당시 낭야왕은 혜제를 따라 업(鄴)에 있었다. 낭야왕의 측근이던 참군(參軍) 왕도(王道)도 낭야왕에게 귀국하라고 권했다. 왕도(王道)는 낭야 지방의 이름난 호족 왕씨의 일족으로 낭야왕보다 아홉살 많았다. 왕도(王道)의 설득으로 낭야왕은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업(鄴)을 탈출해 낙양에서 어머니를 만나 함께 산동의 낭야로 돌아갔다. 8왕의 난영가의 난을 치르면서 진(晉)나라의 황족은 거의 다 죽었다. 동쪽의 낭야로 돌아가 다시 서주(徐州), 양주(揚州)의 군사를 감독하고 왕도(王道)의 의견에 따라 건업(建業, 낙양)을 본거지로 정한 낭야왕만 건재했다. 낙양과 장안이 함락되자 낭야왕 사마예는 주위로부터 제위에 오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서진이 멸망한 후 포로가 된 민제 사마업(司馬鄴)이 평양으로 끌려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겨우 ‘진왕(晉王)’이라 칭하는 것만 승낙했다. 민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진왕 사마예는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라 연호를 태흥(太興)이라 고치고 남경의 땅을 건강(建康)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왕과 말이 천하를 함께 한다

동진 초기 사람들은 ‘왕과 말이 천하를 함께 한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왕이란 왕도와 그의 사촌 왕돈으로 대표되는 낭야 왕씨 일족을 말하고, 말은 황실의 사마씨를 말한다. 왕씨가 황실과 더불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황제가 천하를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말’쪽에서는 이런 상태가 불만일수 밖에 없었다. 황제가 왕씨의 힘을 억누르려고 한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왕과 말이 산동성 남부에 해당하는 낭야에서 강남땅으로 건너왔을 때 그 힘은 미미했다. 만일 토착 세력이 연합해서 그들을 배척했다면 동진 정권은 수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왕과 말’은 운이 좋았다. 진민 토벌의 긴장이 아직 남아 있던 강남에 그들이 온 것이다. 강남의 호족들은 그때까지 여러 번 따끔한 맛을 봤기 때문에 처음에는 좀처럼 이 ‘왕과 말’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도의 훌륭한 사전 공작 덕분에 마침내 호족들도 그들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진나라의 황족이었으므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진민에게 붙는 것과 사정이 달랐다.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왕도의 수완도 훌륭했으나 사람들도 멋지게 그 위에 편승했다. 수년 뒤 낙양이 함락되고 서진이 궤멸하자 강남으로 흘러들어온 '왕과 말'의 권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 만일 사마예가 처음부터 황제를 칭했다면 강남 호족도 그들을 경계했을 것이다. 왕도의 작전이 잇따라 들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