堯
語源
고문자 堯자는 사람의 위에 있는 흙의 뜻을 따르는데, 아래 부분은 무릎을 꿇은 사람의 모습이고, 위 부분은 두 개의 흙더미(때때로 하나의 흙이거나, 두 개의 흙이거나, 세 개의 흙으로 같지 않다)로, 산언덕의 형상을 말하며, 사람의 머리보다 한결 높은 흙더미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堯의 본뜻은 높고 큰 토산이며, 그 뜻이 파생되어 높다는 뜻이 되었다. ‘說文古文’을 보면, 아래 부분은 두 명의 사람이고 위 부분은 두 개의 ‘土’자로, 갑골문 자형의 창제 원리와 다르지 않다. 이 글자는 후에 전설 속의 고대의 황제 陶唐의 성씨의 전용 이름이 되었으며, 또한 성씨로 사용된다. 그것의 본래 뜻은 嶢자로 대체되었다.
文化
요왕(堯王)은 일반적으로 제요 도당(薺堯 陶唐)으로 불리며, 제곡 고신(帝곡 高莘)의 아들이다. 후세에 도덕적으로 완벽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요왕의 시대에 들어서 황하 강 유역에 중앙집권적인 정치세력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인정이 많고 도덕적인 측면 때문에 20살에 왕위에 올랐고, 역시 그런 면을 백성들에게 인정받아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혹시 자신이 독단적인 정치를 할까 염려하여 궁전 입구에 '감간고(敢諫鼓:감히 간언을 드리는 북)'를 달기도 하였다.
이토록 편안한 정치를 행하던 요왕도 황하의 홍수만은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 곤(鯤)이라는 기술자를 불러 8년간 치수공사를 하게 했지만, 황하의 세찬 물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어느새 요왕이 제위에 오른 지 68년, 그는 주변 사람들을 시켜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고,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만한 인재를 찾게 하였다. 마침내 전욱 고양의 후손이자 성실하고 뛰어난 기술자인 순(舜)을 찾았고 요왕은 즉시 순을 등용했다. 순을 등용해보니 듣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인재였으며, 정치 대사에 대해 전혀 막힘이 없었다. 요왕은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냈다. 이때 순의 나이 30세였다.
이때 순에게는 이복 어머니와 동생인 상(象)이 있었는데, 순의 갑작스런 출세를 못마땅하게 여겨 순을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아내들의 도움으로 순은 위기를 극복하였으며, 자신을 죽이려 한 어머니와 동생을 용서해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요왕은 순이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을 인재라고 칭찬하였고, 순이 60세가 되던 해애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때 요왕의 재위 98년, 나이 11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