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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胆] 대담하게, 과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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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는 10승(升)(의 용량을) 말한다. 상형이다. 자루가 있다. 斗부에 속하는 한자는 모두 斗의 의미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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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창조(賈昌朝)는 (“十升也”를) “升十之也(승십지야)”라고 썼다. 이 ‘斗’의 전문은 낭떠러지[斗陗(두초)]라는 뜻의 ‘斗’를 가차하여 쓰고 있는데 왜냐하면 ‘斗’의 모양이 네모지고 곧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자(俗子)로 (따로 ‘낭떠러지’라는 뜻을 가진) ‘陡(두)’ 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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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는 국자[斗]의 모양, 아래는 손잡이의 모양을 상형하였다. 국자에 손잡이가 있는 것은 ‘북두(北斗)’의 모양을 상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斗’의 발음은 當(당)과 口(구)의 반절이다. 4부에 속한다. 허신은 속자(俗子)를 설명하면서 “사람[人(인)]이 ‘十(십)’을 잡은 것을 ‘斗’라 한다.” 고 하였다. 위진 시대 이후 ‘升(승)’자를 만들었는데 ‘斗’자가 ‘升’자와 유사하지만 升은 아니고 ‘斤’과 유사하지만 ‘斤’도 또한 아니다. 그래서 (세속에서 ‘斗’자의 자형이) 사람[人]이‘十’을 잡은 모양이라고 설명했던 것이다.<ref>염정삼,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p.680</ref>
  
 
==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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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2일 (화) 01:17 기준 최신판

語源

말 두.png

갑골문, 금문의 斗 자는 긴 손잡이[柄]가 달린 국자의 형상이다. 斗는 고대에 술을 담는 기구였다. 또 곡식의 양을 재는 기구였으므로, 용량의 단위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10승은 1두이고, 10두는 1석이다. 斗자가 커다란 국자의 모양을 나타냈기 때문에, 하늘에 일곱 개의 별이 커다란 국자 모양으로 무리를 이룬 모양을 斗, 즉 북두성(北斗星)이라 했다. 斛・料・斟 등과 같이 대체로 斗를 따르는 글자들은 대부분 측량하는 기구[量器]와 관련이 있다.

[斗室] 매우 작은 방

[斗胆] 대담하게, 과감히


‘斗’는 10승(升)(의 용량을) 말한다. 상형이다. 자루가 있다. 斗부에 속하는 한자는 모두 斗의 의미를 따른다.

(1) 가창조(賈昌朝)는 (“十升也”를) “升十之也(승십지야)”라고 썼다. 이 ‘斗’의 전문은 낭떠러지[斗陗(두초)]라는 뜻의 ‘斗’를 가차하여 쓰고 있는데 왜냐하면 ‘斗’의 모양이 네모지고 곧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자(俗子)로 (따로 ‘낭떠러지’라는 뜻을 가진) ‘陡(두)’ 자를 만들었다.

(2) 위는 국자[斗]의 모양, 아래는 손잡이의 모양을 상형하였다. 국자에 손잡이가 있는 것은 ‘북두(北斗)’의 모양을 상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斗’의 발음은 當(당)과 口(구)의 반절이다. 4부에 속한다. 허신은 속자(俗子)를 설명하면서 “사람[人(인)]이 ‘十(십)’을 잡은 것을 ‘斗’라 한다.” 고 하였다. 위진 시대 이후 ‘升(승)’자를 만들었는데 ‘斗’자가 ‘升’자와 유사하지만 升은 아니고 ‘斤’과 유사하지만 ‘斤’도 또한 아니다. 그래서 (세속에서 ‘斗’자의 자형이) 사람[人]이‘十’을 잡은 모양이라고 설명했던 것이다.[1]

文化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때에 이미 도량형을 관리하는 전문 관직이 설치되었다. 그러다 춘추전국시대에 들어 여러 나라로 분열되면서 나라마다 도량형 단위가 제각각으로 달라졌다. 이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문자와 함께 도량형도 통일하게 된다. 고대 중국에서 주로 사용했던 부피 단위로는 되[升(승)]와 말[斗(두)], 휘[斛(곡)], 약(龠), 합(合) 등이 있다. 升은 바닥이 얕은 국자 속에 어떤 물체가 들어있는 모습을, 斗는 술 같은 것을 담는 국자 모양을 형상화했다. 1말[斗]은 10되[升]요, 10말이 1휘[斛]이다. 또 약(龠)은 가로 세로가 각각 9분(1/100척)이고 깊이가 1촌(1/10척)에 해당하는 용기의 부피이며, 1합(合)은 2약(龠)을 말한다.[2]

고대의 말[斗]의 용량은 후대에 비해서 훨씬 적었다. 춘추전국시대의 1말은 현재의 2되에도 미치지 못했다. 서안(西安) 삼교(三橋)에서 출토된 전한(前漢)시대의 도량형 용기는 10두의 동종(銅鐘)에 소맥(小麥) 32.3근(斤)을 담을 수 있었으므로, 1말은 소맥 3.23근을 담을 수 있었다. 즉, 斗와 筲(소)[3]는 모두 매우 작은 용기였다. 그래서 『논어』자로편(子路篇)에서 공자는 당시 관리를 비판하며 국량(局量)이 협소한 사람을 ‘두소지인(斗筲之人)’이라고 하였다.

斗의 용량이 작아도 그것으로 사람의 담(膽)을 형용하면, 그 담은 대단히 큰 것이 된다. 『삼국지(三國志)』촉서(蜀書) 강유전(姜維傳)에는 강유가 참수를 당한 후에 그의 시체를 해부하였더니, 그의 담이 斗처럼 컸다[膽如斗大]고 한다. 이 말이 비록 과장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삼국시대의 1말은 현재의 3되 남짓이었으므로, 만약 현재의 1말 10되의 용기로 계산하면 ‘담이 斗처럼 컸다[膽如斗大]고 한다. 이 말이 비록 과장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삼국시대의 1말은 현재의 3되 남짓이었으므로, 만약 현재의 1말 10되의 용기로 계산하면 ‘담이 斗처럼 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전체 내장이 차지하는 공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원대(元代)에 와서는 1말의 용량이 9,500㎖로 오늘날 1말의 용량인 10,000㎖에 근접하였다. 원대의 학자 노기(盧琦)의 시 ‘지정기해하숙진정암(至正己亥夏宿眞淨巌)’이라는 시에서 “기쁘게 내 작은 방[斗室] 바닥에 앉으니, 방안 가득 맑은 가을 기운이로다[欣然坐我斗室底, 滿室巖氣生淸秋]”라고 하였다. 이것은 斗의 용량이 어느 정도 커지면서 사람들이 斗를 방의 크기와 연관시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4]

斗는 밤하늘에도 있는데, 북두칠성(北斗七星)이 바로 그 것이다. 북두칠성은 말 그대로 일곱 개의 별이 북쪽 하늘에서 국자[斗]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갑골문과 금문에서 斗는 모두 돌출된 자루(손잡이), 즉 두병(斗柄)이 있는데, 이러한 특징 때문에 오늘날 담뱃대를 ‘연두(煙斗)’, 다리미를 ‘울두(熨斗)’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두와 울두는 모두 斗 자를 사용하여 구성된 실물명사로, 이들의 공통점은 斗처럼 자루를 지녔다는 것이다.[5]

  1. 염정삼,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p.680
  2. 하영삼, 『문화로 읽는 한자』, 동방미디어, 1998, pㅔ.195-196
  3. 1筲는 1말 2되들이의 대그릇이다.
  4. 조선탁(曹先擢), 『중국어 한자의 어원』, 지식과교양, 2011, pp.76-77
  5. 조선탁(曹先擢), 『중국어 한자의 어원』, 지식과교양, 2011, p.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