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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唐代)
 
*당대(唐代)
쏭첸캄포와 당나라 공주 [[문성공주]]의 혼인에 관한 역사적 사건은 여러 각도로 해석되어진다. 중국 정부 측에서는 한문화가 티베트에 최초로 전해진 계기이자 두 민족 간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고 반면 티베트는 각각 독립국가로서의 교류였고 당이 토번의 압박에 못 이겨 혼을 진행시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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쏭첸캄포와 당나라 공주 [[문성공주]]의 혼인에 관한 역사적 사건은 여러 각도로 해석되어진다. 중국 정부 측에서는 한문화가 티베트에 최초로 전해진 계기이자 두 민족 간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고 반면 티베트는 각각 독립국가로서의 교류였고 당이 토번의 압박에 못 이겨 혼인을 진행시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송대(宋代)
 
*송대(宋代)

2015년 11월 29일 (일) 21:59 판

역사

 중국의 역사서에는 토번(土蕃)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는데 이 명칭은 14세기까지 지속된다. 

2세기 이전부터 티베트 지역에 여러 부족들이 이미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나 역사서에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말 7세기 초에 쏭첸캄포가 부족들을 통일하고 통치제제를 정비하면서 부터이다. 이 시기에 티베트 고유 영역을 확정지었음은 물론 문자를 창제하였고,새로운 종교를 출현시켜 국가와 사회의 구심력을 확보하였다. 토번 왕조는 곧이어 대외 정복사업을 전개한다. 토번은 확장은 물론 주변의 많은 민족들을 제국의 영향 하에 둘 수 있었다. 토번은 당의 멸망과 함께 몰락하게 되는데 그 후 티베트의 땅에는 300년 동안 정치적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었다. 송대 무렵 티베트의 민족 형성이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사천 서남부와 운남 북부의 고원일대에 티베트족이 거주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로 이해되고 있다.

중원과의 관계

  • 당대(唐代)

쏭첸캄포와 당나라 공주 문성공주의 혼인에 관한 역사적 사건은 여러 각도로 해석되어진다. 중국 정부 측에서는 한문화가 티베트에 최초로 전해진 계기이자 두 민족 간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고 반면 티베트는 각각 독립국가로서의 교류였고 당이 토번의 압박에 못 이겨 혼인을 진행시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송대(宋代)

송대에는 티벳과의 책봉과 조공의 관계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중앙정부에 의한 전면적인 관계가 아니라 차마호시와 같은 국경무역이었으며 또한 티베트 지방정권과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 원대(元代) 이후

13세기 이후 티베트는 티베트 몽고와의 관계를 통하여 중원과의 정치적 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명 왕조와의 관계는 그 내용면에서 다소 변화가 있었기는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전과 다름없이 책봉 등과 같은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청조와의 정치적 관계는 더욱 밀접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나 몽고의 역할이었다. 몽고는 만주 황실을 위하여 만주시절부터 이미 티베트와의 교량 역할을 하였으며, 만청황실의 티베트지배는 실제로 티베트에 대한 몽고의 기득권을 승계하는 것으로부터 획득되었다.

  • 근현대

청이 멸망한 뒤에는 13대 달라이라마가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50년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가 되었고 최근에는 중국 정부와 독립에 관해 복잡한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다.

지형적 특성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는 티베트는 지형상의 고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하는것은 물론, 히말라야 산맥이 놓여있다. 중국의 젖줄기와 다름없는 황하 장강은 티벳고원에서 발원한다. 이 지리적 조건을 문화와 연계하여 보면, 중국 황하문명과 중앙아시아의 초원형 유목문화 및 아시아 양대 하천의 반월형 옥토문화 그리고 남아시아 아열대에서 잉태된 인도문화와 사방으로 연계되어있다. 즉 인류 문명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4대 고문명이 티베트 히말라야를 지붕삼아 사방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 고원성 건조 기후

티베트는 고원성 건조 기후를 가져 채소나 식물이 거의 자라나지 않는다. 자연히 그들의 주식은 야크를 위주로 한 육류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식생활은 비타민 C 결핍 및 다양한 질병을 가져오게 하였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신선한 야채를 섭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던 티베트인들에게는 차는 구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티베트인에게는 “차는 피요. 살이요. 생명이요.” 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전해질 정도로 필수적인 식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한 편으로 티베트의 기후는 모든 것을 원형 보존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는 주위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지만,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그 자체문화의 고유성은 잃지 않았다. 건조함과 희박한 산소량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티베트의 고원성 기후 조건은 티베트 민족의 외부 적응력에 상당한 제약으로 작용한다. 평지인이 고원성 기후에 적응하기 어렵듯이 티베트민족은 평지의 기후 조건에는 부적응 현상을 나타낸다. 티베트 민족의 거주지의 제한성이 이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에 삶의 공간을 제한시키고 있으며 이 제한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특수한 조건 적응현상은 티베트문화가 보이는 강한 전통 유지성 형향과 맥을 같이 한다. 근대이전까지 전통적인 방식과 유목형의 경제 형태와 고원성 삶을 유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