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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의 용도는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식기'와 '제사'의 용도이다. 鼎의 문헌을 살펴보면, 鼎은 ‘솥에 삶다, 솥에서 요리하다, 조리하다’의 의미로 쓰였다. 즉, 당시 鼎은 식기로서 크게 취사용과 담는 그릇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발 아래 불을 피워 고기류를 조리할 때는 큰 鼎, 고기와 생선 등을 담는 용도로 쓰이는 升鼎은 작은 鼎이었다. 담거나 조리하는 대상물은 거의 대부분 고기(생선 포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담는 식기로 쓰일 때는 鑊에서 조리하여 익힌 음식물을 옮겨 담는 식기로 쓰였다. 鼎의 문제점은 도기에서 청동기로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나타난다. 취사용으로 사용하기에 청도기는 너무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br>후에 노예제사회로 진입하면서, 특히 상대 서주때 청동으로 만든 鼎이 국가의 중요한 기물이 되면서 鼎은 통치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鼎’은 단순히 식기가 아닌, 통치 권력의 전유물, 상징이 되었다. 특히 청동鼎의 경우 예제화가 뚜렷해져 각각의 鼎마다 다른 용도가 생겨났고, 규칙도 만들어졌다. 이 鼎을 영원히 변치 않는 법이란 뜻으로 ‘이기(彝器)’라고 불렀고, 고귀한 제왕의 그릇이란 의미로 ‘상보지기(常寶之器)’라고도 불렀다.<ref>유현아, 「솥류 한자 ‘鼎’과 ‘鬲’에 대한 고찰」, 『中國學論叢』, vol.58, 2018.</ref> ‘하나라의 우임금이 구정을 만들어 천하를 알렸다.’와 같은 일화에서 나오는 ‘구정’이 바로 이 鼎을 뜻한다.<ref>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ref> 이처럼 鼎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고대 중국이 9개의 주로 나뉘었던 것처럼 九鼎은 국가 정통성을 나타냈다. 九鼎을 얻어야만 천자가 될 수 있었다. <br>鼎의 가장 균형 잡인 형태는 세 발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이 정형이었다. 그래서 鼎立은 솥의 세 발이 균형을 잡고 선 것을 말한다. 定革은 ‘솥을 제자리에 놓았다’는 뜻으로부터‘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을 시작했다’는 뜻이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鼎은 예기로서의 종묘에서 공덕을 새기고 기록하는 데 쓰였다. <br>問鼎은 ‘솥에 대해 수소문한다’는 뜻으로부터 ‘권력을 넘보다’라는 뜻이 나왔다. 이러한 鼎의 중요성은 사용의 엄격한 제한을 가져왔는데,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사대부는 5정을 사용했다. 鼎이 들어간 한자들은 모두 ‘솥’이라는 의미를 담는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 3, 201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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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의 용도는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식기'와 '제사'의 용도이다. 鼎의 문헌을 살펴보면, 鼎은 ‘솥에 삶다, 솥에서 요리하다, 조리하다’의 의미로 쓰였다. 즉, 당시 鼎은 식기로서 크게 취사용과 담는 그릇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발 아래 불을 피워 고기류를 조리할 때는 큰 鼎, 고기와 생선 등을 담는 용도로 쓰이는 升鼎은 작은 鼎이었다. 담거나 조리하는 대상물은 거의 대부분 고기(생선 포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담는 식기로 쓰일 때는 鑊에서 조리하여 익힌 음식물을 옮겨 담는 식기로 쓰였다. 鼎의 문제점은 도기에서 청동기로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나타난다. 취사용으로 사용하기에 청도기는 너무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br>후에 노예제사회로 진입하면서, 특히 상대 서주때 청동으로 만든 鼎이 국가의 중요한 기물이 되면서 鼎은 통치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鼎은 단순히 식기가 아닌, 통치 권력의 전유물, 상징이 되었다. 특히 청동鼎의 경우 예제화가 뚜렷해져 각각의 鼎마다 다른 용도가 생겨났고, 규칙도 만들어졌다. 이 鼎을 영원히 변치 않는 법이란 뜻으로 ‘이기(彝器)’라고 불렀고, 고귀한 제왕의 그릇이란 의미로 ‘상보지기(常寶之器)’라고도 불렀다.<ref>유현아, 「솥류 한자 ‘鼎’과 ‘鬲’에 대한 고찰」, 『中國學論叢』, vol.58, 2018.</ref> ‘하나라의 우임금이 구정을 만들어 천하를 알렸다.’와 같은 일화에서 나오는 ‘구정’이 바로 이 鼎을 뜻한다.<ref>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ref> 이처럼 鼎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고대 중국이 9개의 주로 나뉘었던 것처럼 九鼎은 국가 정통성을 나타냈다. 九鼎을 얻어야만 천자가 될 수 있었다. <br>鼎의 가장 균형 잡인 형태는 세 발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이 정형이었다. 그래서 鼎立은 솥의 세 발이 균형을 잡고 선 것을 말한다. 定革은 ‘솥을 제자리에 놓았다’는 뜻으로부터‘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을 시작했다’는 뜻이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鼎은 예기로서의 종묘에서 공덕을 새기고 기록하는 데 쓰였다. <br>問鼎은 ‘솥에 대해 수소문한다’는 뜻으로부터 ‘권력을 넘보다’라는 뜻이 나왔다. 이러한 鼎의 중요성은 사용의 엄격한 제한을 가져왔는데,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사대부는 5정을 사용했다. 鼎이 들어간 한자들은 모두 ‘솥’이라는 의미를 담는다.<ref>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 3, 2014</ref>
  
 
==참고문헌==
 
==참고문헌==

2018년 12월 17일 (월) 00:11 판

語源

솥정.JPG

다리가 있고 손잡이가 있는 큰 솥을 말한다. 이는 고대 청동기 중 가장 대표적인 기물로, 세 발과 볼록한 배와 두 귀를 가진 기구였다. 발의 좌측과 우측 부분의 짧은 선은 발 부분의 장식을 나타낸다. 금문도 갑골문과 마찬가지로 여러 형태의 자형이 존재하는데, 금문은 갑골문보다 오히려 상형성이 더 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후 서주시기의 금문에 이르러서는 위쪽의 두 귀를 생략하고 배와 다리의 형체만 남아있는 자형으로 변화한다. 소전체로 오면서 두 귀와 몸통이 합쳐져 目로 변해 현재의 자형이 되었다. [1] 허신은 鼎이란 발이 셋, 귀가 두 개이고, 다섯 가지 맛을 조화시키는 보배로운 그릇이라고 말했다.[2]

文化

기원

‘鼎’은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된 기물로 보인다. 8천년 전의 배리강 문화유적지에서 도기로 만든 ‘鼎’이 출토되었다. 鼎의 전신이 되는 기물은 신석기시대 중기에 대표적인 취사도구로 사용된 도기로 만든 ‘부(釜)’와, 도기로 만든 받침대이다. 배리강문화 때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鼎이 등장한다. 그 후, 사용 범위는 황하의 중하류와 장강 중하류지역까지 확대된다.[3]

용도

鼎의 용도는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식기'와 '제사'의 용도이다. 鼎의 문헌을 살펴보면, 鼎은 ‘솥에 삶다, 솥에서 요리하다, 조리하다’의 의미로 쓰였다. 즉, 당시 鼎은 식기로서 크게 취사용과 담는 그릇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발 아래 불을 피워 고기류를 조리할 때는 큰 鼎, 고기와 생선 등을 담는 용도로 쓰이는 升鼎은 작은 鼎이었다. 담거나 조리하는 대상물은 거의 대부분 고기(생선 포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담는 식기로 쓰일 때는 鑊에서 조리하여 익힌 음식물을 옮겨 담는 식기로 쓰였다. 鼎의 문제점은 도기에서 청동기로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나타난다. 취사용으로 사용하기에 청도기는 너무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후에 노예제사회로 진입하면서, 특히 상대 서주때 청동으로 만든 鼎이 국가의 중요한 기물이 되면서 鼎은 통치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鼎은 단순히 식기가 아닌, 통치 권력의 전유물, 상징이 되었다. 특히 청동鼎의 경우 예제화가 뚜렷해져 각각의 鼎마다 다른 용도가 생겨났고, 규칙도 만들어졌다. 이 鼎을 영원히 변치 않는 법이란 뜻으로 ‘이기(彝器)’라고 불렀고, 고귀한 제왕의 그릇이란 의미로 ‘상보지기(常寶之器)’라고도 불렀다.[4] ‘하나라의 우임금이 구정을 만들어 천하를 알렸다.’와 같은 일화에서 나오는 ‘구정’이 바로 이 鼎을 뜻한다.[5] 이처럼 鼎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고대 중국이 9개의 주로 나뉘었던 것처럼 九鼎은 국가 정통성을 나타냈다. 九鼎을 얻어야만 천자가 될 수 있었다.
鼎의 가장 균형 잡인 형태는 세 발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이 정형이었다. 그래서 鼎立은 솥의 세 발이 균형을 잡고 선 것을 말한다. 定革은 ‘솥을 제자리에 놓았다’는 뜻으로부터‘나라를 다스리는 대업을 시작했다’는 뜻이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鼎은 예기로서의 종묘에서 공덕을 새기고 기록하는 데 쓰였다.
問鼎은 ‘솥에 대해 수소문한다’는 뜻으로부터 ‘권력을 넘보다’라는 뜻이 나왔다. 이러한 鼎의 중요성은 사용의 엄격한 제한을 가져왔는데,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사대부는 5정을 사용했다. 鼎이 들어간 한자들은 모두 ‘솥’이라는 의미를 담는다.[6]

참고문헌

  1.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 3, 2014
  2. 허신,『설문해자』
  3. 유현아, 「솥류 한자 ‘鼎’과 ‘鬲’에 대한 고찰」, 『中國學論叢』, vol.58, 2018.
  4. 유현아, 「솥류 한자 ‘鼎’과 ‘鬲’에 대한 고찰」, 『中國學論叢』, vol.58, 2018.
  5. 熊国英, 图释古汉字, 齐鲁书社
  6. 하영삼, 『한자어원사전』, 도서출판 3,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