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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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ddms29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11월 17일 (목) 19:51 판 (1.2. 간화의 과정과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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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简化/簡化)

1.1 간화 배경 1.2 간화 과정과 원리

1.1 간화 배경

한자(漢字)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사용 인구나 범위가 광활하다. 때문에 한자로 기록한 문서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문헌 작성을 위해 그의 배치, 교열 등과 같은 여러 과정을 거쳐 한자는 현대까지 매우 복잡하게 발전해왔다. 한자는 중국 민족의 언어를 기록해온 소중한 문자지만 글자 수가 많고 이체자(異體字: 소리와 뜻이 같은데 글자 모양만 다른 것)가 많으며 그 형태나 필획이 다양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현대 과학문명에 비추어 볼 때 부적합하다고 여기고, 한자의 번잡함은 교육에도 어려움을 미쳤기에 어떤 형태로든 한자를 간략하게 할 필요가 생겨났다.
사실 갑골문, 금문에서도 간략한 문자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한자 간략화는 상나라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로도 간략한 글자체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본격적으로 간화 작업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이지만, 이미 청조 말부터 문자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일어난 국어운동, 라틴화 신 문화 운동 등은 한자 개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신선했지만, 정부의 지지를 받지 못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현대에 들어 1949년 신중국 성립 당시 공업과 농산, 모두 낙후된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개혁이 필수적이었다. 1950년에 공화국을 수립한 뒤, 중국문자개혁연구협회를 세우고 한자간략화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로 인해 불붙기 시작한 문자 개혁 운동의 움직임은 1955년 1월 한자간화방안초안을 만들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1956년 한자간화방안(漢字簡化方案) 공포까지 이르렀다. 한어병음방안의 보급과 함께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지자 일부 지식인들은 한자와 함께 알파벳도 함께 사용하는 문자쌍궤제(文字雙軌制)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 주장은 금세 그쳐지고 말았지만 이와 동시에 한때 한자의 표음화까지도 고려했던 모택동은 고문자 학자인 곽말약(郭沫若)을 인문학 참모로 가까이 하면서 한자를 살리기로 결심한다. 대신 쓸만한 대안 마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한자의 상형성이 지니는 매력을 붓글씨를 통해 즐겨왔던 마오쩌둥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60년대 문화혁명의 공백기를 거쳤지만 1964년 중국국무원은 간화자총표(簡化字總表)를 발표하였고, 80년대 경제 성장의 궤도에 들어오면서 1986년에는 수정을 거쳐 <간화자총표>를 다시 발표하였다. 한자 간화 방안과 보통화 보급 문제가 어느 정도 달성되자, 정부는 또다시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기보다는 당분간 한자의 규범화와 사회에 퍼져 있는 문자 훼손을 바로잡는 데에 총력을 다하기로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오쩌둥, 한자를 살리다 - 간체자 시대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 2005. 11. 7., 바다출판사)


1.1 간화 배경

한자(漢字)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사용 인구나 범위가 광활하다. 때문에 한자로 기록한 문서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문헌 작성을 위해 그의 배치, 교열 등과 같은 여러 과정을 거쳐 한자는 현대까지 매우 복잡하게 발전해왔다. 한자는 중국 민족의 언어를 기록해온 소중한 문자지만 글자 수가 많고 이체자(異體字: 소리와 뜻이 같은데 글자 모양만 다른 것)가 많으며 그 형태나 필획이 다양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현대 과학문명에 비추어 볼 때 부적합하다고 여기고, 한자의 번잡함은 교육에도 어려움을 미쳤기에 어떤 형태로든 한자를 간략하게 할 필요가 생겨났다.
사실 갑골문, 금문에서도 간략한 문자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한자 간략화는 상나라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로도 간략한 글자체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본격적으로 간화 작업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이지만, 이미 청조 말부터 문자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일어난 국어운동, 라틴화 신 문화 운동 등은 한자 개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신선했지만, 정부의 지지를 받지 못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현대에 들어 1949년 신중국 성립 당시 공업과 농산, 모두 낙후된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개혁이 필수적이었다. 1950년에 공화국을 수립한 뒤, 중국문자개혁연구협회를 세우고 한자간략화 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로 인해 불붙기 시작한 문자 개혁 운동의 움직임은 1955년 1월 한자간화방안초안을 만들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1956년 한자간화방안(漢字簡化方案) 공포까지 이르렀다. 한어병음방안의 보급과 함께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지자 일부 지식인들은 한자와 함께 알파벳도 함께 사용하는 문자쌍궤제(文字雙軌制)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 주장은 금세 그쳐지고 말았지만 이와 동시에 한때 한자의 표음화까지도 고려했던 모택동은 고문자 학자인 곽말약(郭沫若)을 인문학 참모로 가까이 하면서 한자를 살리기로 결심한다. 대신 쓸만한 대안 마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한자의 상형성이 지니는 매력을 붓글씨를 통해 즐겨왔던 마오쩌둥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60년대 문화혁명의 공백기를 거쳤지만 1964년 중국국무원은 간화자총표(簡化字總表)를 발표하였고, 80년대 경제 성장의 궤도에 들어오면서 1986년에는 수정을 거쳐 <간화자총표>를 다시 발표하였다. 한자 간화 방안과 보통화 보급 문제가 어느 정도 달성되자, 정부는 또다시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기보다는 당분간 한자의 규범화와 사회에 퍼져 있는 문자 훼손을 바로잡는 데에 총력을 다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