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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長田 夏樹, 契丹語解読方法論序説, 神戸市外国語大学外国学研究, 1984, p.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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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헌사료(『旧唐書』巻199下, 北狄伝室韋条)에는 [[실위]](室韋) 또는 [[실위]](失韋)라고 불리는 민족집단 중에 '몽위 실위(蒙兀室韋)’라는 하위집단이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후의 몽골부의 모체가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거란과 [[실위]](室韋)가 언어계통을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거란소자의 문헌에서 알려진 거란어의 적지 않은 수의 어휘가 몽골 제어와 공통되고 있으며, 그 범위는 기초어휘나 문법형태소에 이른다. 또 거란은 [[선비족]](鮮卑族, 고대 남만주에서 몽골지방에 걸쳐 산 유목민족)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북위]](北魏, 386-534)을 건국한 선비족 탁발부의 언어도 몽골어와 공통 어휘를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일부 어휘에서는 거란어와 탁발어(拓跋語)에 유사한 형식이 보이며 몽골 어족과는 크게 다를 수 있다. 이로 인해, 거란어와 몽골 제어의 사이에는 직접적인 조상과 후손 관계도 없고 거란어와 탁발어(拓跋語) 만큼 가까운 친연 관계도 없지만, 동일한 조상에 해당하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중국 문헌사료(『旧唐書』巻199下, 北狄伝室韋条)에는 [[실위]](室韋) 또는 [[실위]](失韋)라고 불리는 민족집단 중에 '몽위 실위(蒙兀室韋)’라는 하위집단이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후의 몽골부의 모체가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거란과 [[실위]](室韋)가 언어계통을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거란소자의 문헌에서 알려진 거란어의 적지 않은 수의 어휘가 몽골 제어와 공통되고 있으며, 그 범위는 기초어휘나 문법형태소에 이른다. 또 거란은 [[선비족]](鮮卑族, 고대 남만주에서 몽골지방에 걸쳐 산 유목민족)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북위]](北魏, 386-534)을 건국한 선비족 탁발부의 언어도 몽골어와 공통 어휘를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일부 어휘에서는 거란어와 탁발어(拓跋語)에 유사한 형식이 보이며 몽골 어족과는 크게 다를 수 있다. 이로 인해, 거란어와 몽골 제어의 사이에는 직접적인 조상과 후손 관계도 없고 거란어와 탁발어(拓跋語) 만큼 가까운 친연 관계도 없지만, 동일한 조상에 해당하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ref>ŌTAKE Masami, 契丹小字文献における「母音間のg」 (intervocalic ‘g’ in the Khitan Small Script), Kyoto University, 2016, p.20-21</ref>
 
<ref>ŌTAKE Masami, 契丹小字文献における「母音間のg」 (intervocalic ‘g’ in the Khitan Small Script), Kyoto University, 2016, p.20-21</ref>

2022년 12월 16일 (금) 01:14 판

개요

거란어(契丹語)는 10~12세기에 걸쳐서, 현재의 베이징을 포함한 중국 북부와 몽골 지역에 세운 요나라(遼=거란제국, 916-1125)에서 거란 민족이 사용된 언어다. 또 거란문자(契丹文字)는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재위916-926)가 중국 문화에 대응하여 자국어 및 자국 고유 문자에 대한 민족적 자각에 바탕을 두어 기원후 920년에 만들어 공표한 문자이다. 거란대자거란소자라는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문자 체계가 알려져 있다. 이 중 거란소자는 태조의 동생 야율질라(耶律迭剌)가 위구르의 사자에게 그 언어와 문자를 배웠고, 그에 따라 다스렸다는 기술이 『요사(遼史)』에서 볼 수 있으며, 거란대소자는 요대를 통해 사용되었고, 금대(金代, 1115-1234)까지 사용된 후 사문자가 되었다. [1]

거란대자는 한자를 참고 혹은 한자의 글자 모양을 빌려서 만들어진 표의문자였기 때문에 거란어의 다음절 단어나 여러 가지 접사를 표기하는 데에 불편했다. 거란대자와 거란소자의 관계는 거란대자가 불편한 것으로 폐된 후 거란소자가 거란어에 적합한 문자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두 문자는 일정 기간 내내 요나라에서 병용되고 있었다. 상층사회에서는 상당히 유통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중국의 사서에는 두 문자에 의한 시험제도를 기재하고 있다. 1125년에 요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적어도 거란소자는 금대에서도 오랜 기간 유통되어 거란어가 하나의 문장어로서 존속하고 있어, 금대 1191년에 거란문자를 폐지하는 명이 내려질 때까지 전후 300년에 걸쳐 중국 북방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2]

거란에 대해

거란(契丹)은 요하(遼河) 상류 시람렌·라오하 양하 유역을 본거지로 하는 몽골계 수렵 유목민족이다. 10세기 초, (唐)말 5대의 혼란을 틈타, 일대의 영웅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나오자 금세 서로 다투던 부족들을 규합하자 군사를 주체로 하는 정치나 경제 조직을 구축하고 몽골에서 중국 동북구로 세력을 넓히자 요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영토 확장 의지는 그의 차남이자 제2대 황제인 태종 야율덕광(耶律徳光)에게도 받아들여져 태조 & 태종 2대 동안 요나라는 동투르키스탄에서 하북, 한반도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중국의 북변을 수중에 둔 요나라남우(南郵)의 5대 제국, 즉 후량(後梁) · 후당(後唐)・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의 사타(沙陀)·한이민족 왕조(漢二民族王朝)와 대립하여 중국의 재통일을 이룬 송나라(宋)와도 150여 년에 걸쳐 길항했다. 요나라는 이원적 지배체제의 모순과 불사조영 등으로 인한 재정난에서 쇠퇴하여 1125년 금나라의 여진족(女眞族)에 멸망당했다. [3]

거란문자의 계열

중국 문헌사료(『旧唐書』巻199下, 北狄伝室韋条)에는 실위(室韋) 또는 실위(失韋)라고 불리는 민족집단 중에 '몽위 실위(蒙兀室韋)’라는 하위집단이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후의 몽골부의 모체가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거란과 실위(室韋)가 언어계통을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거란소자의 문헌에서 알려진 거란어의 적지 않은 수의 어휘가 몽골 제어와 공통되고 있으며, 그 범위는 기초어휘나 문법형태소에 이른다. 또 거란은 선비족(鮮卑族, 고대 남만주에서 몽골지방에 걸쳐 산 유목민족)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북위(北魏, 386-534)을 건국한 선비족 탁발부의 언어도 몽골어와 공통 어휘를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일부 어휘에서는 거란어와 탁발어(拓跋語)에 유사한 형식이 보이며 몽골 어족과는 크게 다를 수 있다. 이로 인해, 거란어와 몽골 제어의 사이에는 직접적인 조상과 후손 관계도 없고 거란어와 탁발어(拓跋語) 만큼 가까운 친연 관계도 없지만, 동일한 조상에 해당하는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4]

  1. ŌTAKE Masami, intervocalic ‘g’ in the Khitan Small Script), Kyoto University, 2016, p.20-21
  2. 西田龍雄 (2001)「契丹文字」河野六郎 [ほか] 編著『言語学大辞典 別巻 (世界文字辞典)』省堂, p.297.
  3. 長田 夏樹, 契丹語解読方法論序説, 神戸市外国語大学外国学研究, 1984, p.1
  4. ŌTAKE Masami, 契丹小字文献における「母音間のg」 (intervocalic ‘g’ in the Khitan Small Script), Kyoto University, 2016, p.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