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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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우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1일 (화) 14: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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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대의 과거는 공거(貢擧)와 제거(制擧)로 나누어졌었다. 공과는 또한 상과(常科)라고도 하는데 과목에는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명서(明書), 명법(明法), 명산(明算) 등의 과가 있었다.

공거

당 대에는 과거 고시와 임관 등용이 별도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고시를 상서성의 이부에서 주관하였는데 현종 때에 예부로 이관되었으며, 조정에서 파견한 주관자를 ‘지공거(知貢擧)’라고 했고 시험은 일반적으로 매년 한 차례 실시되었다. 상과 중에서도 수재과는 특히 어려워서 천거나 응시자가 적었기 때문에 초기에 시행되었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다. 명법·명서·명산은 기술 과목에 속하며 임관 중 승진도 용이하지 않아 선비들이 중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명경·진사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명경과는 유가경전의 암송을 중시하여 시험 치는 것으로 1경, 2경, 3경 등으로 나누어 응시자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였고, 진사과는 고종 이전에는 단지 시무책(時務策, 정치 논문)을 시험하였으나 후에는 점차 시부 잡문과 경전도 시험하였으므로 고시의 내용이 명경에 비하여 매우 어려웠다. 무측천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문사를 숭상하여 진사과가 특별히 중시되었는데, 많은 고급 관리들이 대부분 진사과 고시 출신이었다.

명경·진사 등의 과거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이부에서 행하는 전서(銓敍) 고시에 합격해야 비로소 정식으로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과거 고시를 통과한 것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부의 시험은 행동거지, 언행, 서법, 공문 판사 등을 보는데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했다. 네 가지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만 드디어 관복을 입을 수 있었다. 만일 이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이듬해의 재시를 기다려야 했으며 바로 관리가 될 수는 없었다.

제거

제거는 황제가 정치적 수요에 따라 임시로 조서를 내려 필요한 각종 과목에 대해 특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다. 평상적으로 실시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영향력이 공거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 과목에는 현량방정(賢良方正), 직언극간(直言極諫), 사조굉려(詞藻宏麗), 재감장수(才戡將帥) 등 80여 종이 있었다. 대개 현직 관리나 서민 모두가 고시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합격하면 관직이 있는 자는 관급이 상승되고 관직이 없는 자는 이부로부터 관직을 받았다.

과거제의 의의

당 대 과거제는 비문벌 지주 대두의 역사적 추세에 따라 중앙 집권 강화에 중대한 작용을 하였고, 인재 선발이란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통일된 객관적 표준을 사용하여 고시를 행하였으므로, 사인들은 공개적으로 경쟁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문벌의 제한도 받지 않았다. 또한 고시가 주로 수도에서 진행되었고 선발권과 임용권도 모두 중앙에 집중 되어 있었으므로, 전국의 인재를 결집시키고 정치·문화·사상의 교류를 촉진시킬 수 있었으며 봉건왕조의 통치기초를 확대하는 데도 유리하였다. 따라서 과거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구품 중정제도와 비교한다면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며 공평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통사>>, 범문란, 꿈엔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신성곤, 윤혜영,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