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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위 초기에 '나의 모습이 비록 비쩍 말랐어도 천하는 반드시 살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를 생각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치세에 걸맞는 판단력과 통치를 통해 올바른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느순간부터 자신의 판단력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성리학자 이현일 등은 그의 저서 갈암집에 '당나라 현종이 재물을 긁어 모으고 사치를 일삼았다.(唐玄宗斂財侈費)'고 비판할 정도로 최악의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제위 초기에 '나의 모습이 비록 비쩍 말랐어도 천하는 반드시 살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를 생각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치세에 걸맞는 판단력과 통치를 통해 올바른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느순간부터 자신의 판단력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성리학자 이현일 등은 그의 저서 갈암집에 '당나라 현종이 재물을 긁어 모으고 사치를 일삼았다.(唐玄宗斂財侈費)'고 비판할 정도로 최악의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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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7일 (화) 10:18 기준 최신판

개요

당현종.jpg

본명은 이융기(李隆基)로 측천무후의 아들인 예종의 3자이다. 제위 이후 애민정책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 민생을 안정시키고, 사회 문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여 태평성대를 이끌어 나감. 이를 일컬어 개원의 치라고 말함. 하지만 이후 양귀비의 등장을 비롯한 간신들의 등장으로 쇠락기를 맞게 되고, 안사의 난을 비롯한 여러 사건이 겹치면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함.

생애

유년기

개원의 치

초기 당현종은 유능한 재상들의 보좌와 애민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끌어 나갔다. 현종의 아래에는 요숭(姚嵩), 한휴, 송경, 장구령, 소숭 등의 유능한 재상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현종에게 가난의 퇴치를 포함한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현종은 이것을 모두 수용하여 시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현종의 제위기간에는 농업생산량이 증가했고, 외국과의 빈번한 교역을 통한 수익의 증가 등을 통해 경제의 발전을 이룩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문화적으로도 매우 발전되었다고 한다.

치세의 몰락

계속된 치세에 의해 점점 더 거만해져간 현종은 주변의 간언하는 신하들을 내치고 자신에게 아첨하고 복종하는 신하들을 곁에 두기 시작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임보이다. 이런 간신배들이 조정에 들어서고 737년 사랑하던 무혜비가 죽자 현종의 방황은 더욱 심해진다. 이러던 도중, 자신의 며느리였던 양귀비를 만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양옥환을 745년 귀비로 책봉하고, 황후의 권력을 대신하게 한다. 이시기의 양귀비 일가의 세도는 말할 수 없이 높았는데, 특히 사촌오빠였던 양검의 횡포가 심했다. 그는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결국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는데, 현종의 주변에 아첨꾼과 소인배들을 두고, 충신을 죽이는 등 많은 전횡을 일쌈았다고 한다. 결국 이후 현종은 안사의 난등의 사건 등을 통해 실제 권력을 모두 잃게 되었고, 756년 양귀비마저 곁에서 떠나보내고 말았다. 그 후 그는 762년 병을 얻게 되었고, 5월 3일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평가

그는 제위 초기에 '나의 모습이 비록 비쩍 말랐어도 천하는 반드시 살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를 생각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치세에 걸맞는 판단력과 통치를 통해 올바른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느순간부터 자신의 판단력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성리학자 이현일 등은 그의 저서 갈암집에 '당나라 현종이 재물을 긁어 모으고 사치를 일삼았다.(唐玄宗斂財侈費)'고 비판할 정도로 최악의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 인물이다.